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정필수
1861~1894. 광주 정씨. 청주목 산외면 대주리와 가까운 서당리 부근에서 살다가 강내면 궁현리로 이주. 동학농민군을 이끈 장사로 지목되어 청주병영의 병대에 붙잡혀서 효수.
정용승
1939~ . 정필수의 증손자. 동학군 선봉대장으로 활약하던 증조부에 관한 사적을 조부에게 전해듣고 기록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애씀. 한국교원대 교수로서 대기오염 문제를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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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우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1894년 청주 일대는 동학의 세상이 된다. 청주를 무대로 활동을 하던 동학의 대접주도 손병희, 손천민, 서장옥 등 교단의 중심 인물이었다. 오랫동안 사교로 탄압받던 동학교도들이 모임을 갖거나 분주히 모여다녀도 막을 사람이 없었다. 읍내를 제외한 주변 여러 마을은 마치 동학 마을처럼 변했다. 이해 9월 말 교주 최시형의 기포령에 따라 동학세력이 읍성 점령에 나서자 청주는 곧 내전의 중심 지역이 되었다. 읍성 안에는 충청도 내륙의 방어를 책임진 병영인 진남영이 있었다. 읍성을 공격한 동학농민군은 반격하던 청주병영의 병대와 전투를 벌이면서 여러 날을 대치하였다. 청주 음성을 둘러싼 동학농민군을 물리치지 못한 청주병사 이장회는 조정과 인근 군현의 지방관에게 그 사실을 알리고 구원병 파견을 요청하였다. 며칠 동안 계속된 이 구원 요청은 청주 공방전을 전국에 이름나게 만들었다. 양호도순무영은 서울에서 경기도 죽산, 안성 등 남부 군현의 동학세력을 진압하도록 파견한 장위영군을 비롯한 경군 병대들을 청주로 직행하게 하였고, 새로 증원되어온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 병력도 청주를 중요 목적지로 겨냥해서 내려왔다. 9월 말 청주는 내전의 격전지로 변했던 것이다. 청주성에서 이처럼 치열하게 싸웠던 동학농민군은 ‘수천 명’에 달한다. 청주병사가 조정에 보낸 보고서에서 그렇게 기록했다. 이들은 다 누구였을까? 지금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청주 일대에서 동학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로 생각된다. 주로는 가난한 농민들이었고, 부농과 일부 지주들도 가세하였다. 청주목의 향리도 있었고, 글공부도 할 만큼 했던 양반유생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어디에 살던 누구였는지 자세히 알 수 없는 것이다. 동학 조직의 문서들은 이미 갑오년 당시 모두 없어져서 두드러지게 활동한 대접주 정도나 미미하게 그 활동상이 전해지는 형편이다. 많은 수였던 말단 접의 접주와 접사들도 이름조차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조정의 진압 기록에 일부가 이름만 남아있다. 한국교원대 정용승 교수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에게 증조부가 동학에 들어가 활약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증조부는 갑오년의 역사에서 잃어버린 이름의 하나이다. 우리는 정교수의 증언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6·25전쟁을 맞아 청주 강내면으로 피난을 왔어요. 할아버지께서 증조부님 묘지 앞에 데리고 가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지요. 힘이 장사였던 증조부님께서 동학에 들어가서 선봉대장으로 활약하다가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지요. 꽤 많은 말을 들었지만, 그런 옛날 말엔 흥미가 없었어요.
가족사의 비화는 나이가 들어서야 절실해지는 법이다. 뒤늦게 정용승 교수의 가족들은 증조부의 기록을 찾기 시작했다. 나라를 위해 희생당한 까닭에 어디라도 그 이름이 남아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노력한 끝에 지난 1975년 서울 남산에 있던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고종시대사』와 『관보』에 청주에서 이름 글자가 같은 분이 효수되었다는 기록을 찾을 수 있었지요. 이것이 『관보』기록입니다. 그런데 글자 하나가 달랐어요.
조선 개국 503년 10월 1일자 『관보』에 충청도 병마절도사 이장회가 군관 이용정 등을 시켜 청주 등지에 동학도 두령 이종묵(李宗默), 홍순일(洪順日), 장사 정필수(鄭弼壽) 등을 붙잡아와서 군민대회(軍民大會)를 열고 효수했다는 기록이 있다. 바로 이 기록을 발견한 것이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증조부에 관한 기록이 분명하였다. 장사로서 동학에 들어가 활동했다는 것이나 청주에서 활약한 사실이 그러했다. 하지만 이름의 끝 글자가 달랐다. 족보에 나온 글자는 ‘壽’자가 아닌 ‘洙’자였다. 다시 더 자세한 기록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 후 일본에 갔을 때 동경대학 도서관도 찾아 기록을 뒤져봤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정황이 맞으면 비록 이름 글자가 다르더라도 본인이 틀림없는 것으로 여겨도 된다. 전봉준과 손병희 같은 대표적인 인물도 자료마다 각각 틀린 이름으로 나오는 것을 쉽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갑오년 10월 1일에 나온 『관보』의 기록인데 족보에 제삿날이 음력 9월 24일로 되어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예전에는 집을 나가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경우에는 집 나간 날을 제삿날로 삼았던 예가 많았다. 두 날짜가 틀리는 것도 이와 같은 사례일 것으로 생각된다. 정교수는 다음과 같이 집안과 증조부에 대해 말한다.
증조부님은 광주 정씨 18세손으로 1861년 10월 16일 청주 북이면 서당리에서 출생하셨습니다. 유교 경전을 열심히 공부하신 훌릉한 선비였습니다. 증조부님의 부친인 우리 고조부님은 석(錫)자 영(永)자로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 : 1811~1876) 선생에게 경학을 배운 제자이지요. 대한제국 때 내부주사와 군의관 또는 전문위원 등으로 관직에 봉사하셨어요. 광주 정씨는 14세 겸재[鄭敾] 선생이 유명하지요. 청주에 자리를 잡은 것은 11대조부터입니다. 처음에는 동쪽 인경산 아래 화곡(禾谷)에 살았다가 15살 때인 1780년 이후 북이면 서당리 작은 야산 밑의 따뜻한 양지 쪽으로 이전해서 글방을 열었어요. 1882년에 작성된 호적단자를 보면 노비를 거느리고 넉넉하게 살던 증조부대의 사정을 잘 알 수 있지요. 노비의 수는 남자 3명, 여자 6명 모두 9명이었습니다. 의암 손병희 선생이 출생한 금암리는 글방이 있던 서당리의 남양골에서 북쪽으로 불과 500m가 떨어져 있지요. 증조부님과 손병희 선생은 나이가 서로 같아요. 아마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냈겠지요.
당시 금암리와 대주리가 청주에 동학을 전파한 본거지 역할을 한 것을 생각하면 양반가의 젊은 선비가 이 새로운 사상을 가진 종교에 관심을 가졌던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동학에 들어간 이후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1880년경 정씨가는 청주의 서쪽 지역인 강내면 궁현리 정산골에 적지 않은 땅을 사서 옮겨간다.
우리 가족은 아직도 북이면 서당리와 인근 토성리에 야산과 전답을 약 2만 평 정도 가지고 있어요. 강내면 궁현리에도 꽤 있지요. 지금 남아있는 문서를 보면 더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어요. 8·15 이후 토지개혁 때 전답이 많이 줄어들었지요. 저의 조부가 개성과 서울 등지로 다니면서 농지를 매도한 문서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재산으로 동학혁명 당시 군량미에 보태거나 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보내는 데 쓴 것이 아닌가 해요. 방증을 들면 청주의 거부이고 임시정부 외무총장을 하신 민찬호(閔贊鎬) 선생이 우리 고조부와 종조부에게 보낸 서신이 있지요. 약 30편 가량 발견해서 보관중입니다. 고조부는 대한제국 내부(內部)에 근무하면서 청주의 아들들에게 약 300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분은 3형제의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셨어요. 큰아들인 학자 수자는 개성중학에서 교원을 지냈고, 성균관에서 수학을 한 막내아들 진사 택자 수자는 주로 궁현리 정산골을 지키고 계셨지요. 둘째아들인 필자 수자도 문필이 뛰어나고 인망이 있었습니다. 이 문서는 청주나 강내면에서 무슨 직책을 맡을 때 쓴 것인데 삼망(三望) 중 첫째 자리에 쓰여 있지요. 또 체력이 월등해서 장사였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이 행패를 부리는 것을 보고 엽전 다발을 200량이나 번쩍 들어 그에게 올려놓으니 꼼짝 못하고 살려달라고 했답니다. 전해지는 얘기는 과장이 있겠지만 2미터 되는 소나무도 훌적 뛰어넘었다고 하고 밤에는 어머님을 깨우지 않으려고 잠긴 싸리문과 담장을 자주 뛰어넘어 다니셨다고 합니다.
청주에서 갑오년 봉기를 준비한 마을의 사정에 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최근 남일면 송산리에서 청의대접주 손천민이 진주 강씨의 도움을 받아 활동한 사실이 확인된 것을 빼놓고는 수천 명이 모여서 무장활동을 한 내용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뒤늦게 우리는 청주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의 또 다른 근거지가 강내면 궁현리에 있었던 것을 정용승 교수의 증언을 통해 알게 된다.
강내면도 동학 세력이 컸다고 해요. 이곳에서 가장 높은 산인 은적산 정상 부근에는 봉화대 자리가 있고 그 옆에 돌성을 쌓은 터가 있습니다. 이 일대의 동학농민군은 은적산에 올라와서 군사훈련을 했다고 합니다. 저쪽 연정마을에 사는 조병천(趙炳天)이란 노인이 이런 일들을 잘 알고 있지요. 지금 86세 되시는 분으로 이 분 부친이 조희원(趙羲元) 씨인데 동학으로 궁현리와 연정리가 시끄러워지자 연기군에 피난하였다가 몇 달 뒤에 집에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남일면 신송리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들어보면 궁현리 일대의 모습도 비슷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름부터 신송리의 진주 강씨댁은 봉기의 근거지가 되어 각처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이들은 화승총과 화약 그리고 칼과 죽창을 구해 훈련하였다. 화승총은 구하기가 어려웠지만 구입할 때는 소 몇 마리 값에 해당하는 돈이 필요했다. 칼은 동지내라는 곳에 있는 대장간에서 몰래 만들어왔다. 죽창은 전라도에서 대나무를 가져다가 직접 만들었다. 이렇게 준비한 무기를 가지고 젊은 장정들이 뒷산에 올라가서 군사연습을 했다. 청주 일대에서 동학의 각 포접 조직이 훈련을 하며 봉기날을 기다린 기간은 오래되었던 것 같다. 그동안에 청군과 일본군이 충청도 일대에서 전쟁을 벌였고, 일본군이 경복궁을 습격해서 친일정권을 내세우는 등 여러 혼란이 계속되었다. 마침내 전라도에서 대대적인 2차 봉기가 시작되었고, 동학교주 최시형도 기포령을 내렸다. 교주의 기포령이 전달되자 수천에 달하는 동학농민군은 9월 20일경 청주 성안에 있는 진남영과 관아를 기습했다. 청주병영의 병정들은 훈련이 잘된 정예병이었으나 수가 많은 동학농민군이 기습해오자 처음에는 병영을 지키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신식 무기인 스나이더 소총으로 무장한 병정들은 곧 반격을 가해서 동학농민군을 읍성 밖으로 몰아냈다. 동학농민군은 육거리를 거쳐 무심천 건너까지 퇴각하였다. 동학농민군과 진남영 병정들은 며칠 동안 무심천 양쪽 제방을 사이에 두고 병정들과 대치하였다. 무심천변에 모인 동학농민군의 수가 많다고 판단한 청주목사와 영장은 충청도 감영과 의정부에 급보를 보내어 원병을 청하였다. 주변 군현에도 급보를 보냈다. 지방관이 동원하기 쉬운 청주의 보부상도 합세시켰다. 이같은 대치상태는 9월 28일경 청주병영의 승리로 결판이 났다. 승패를 결정한 주요 원인은 병정들이 우세한 무기를 가진 것이었다. 병정들이 포를 가지고 와서 쏘아대자 훈련이 안된 동학농민군은 놀라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런 기회를 타서 병정들이 무심천을 멀리 우회해서 건너와 기습을 가하였다. 무심천 제방과 남들의 넓은 들판은 전장터가 되었다. 서로 치열하게 싸웠으나 사기가 떨어진 동학농민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흩어지고 말았다. 읍성 방어에 성공한 청주병영은 곧 사방에 병정들을 파견해서 동학 근거지를 제압하고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을 붙잡아오도록 했다. 신송리는 극심한 보복을 받았다. 궁현리도 군관 이용정이 거느린 병정 일대가 와서 동학 두령과 군사지도자를 붙잡아갔다.
증조부는 선봉대장으로 활약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관군에게 잡혀 총살형을 당하셨지요. 힘이 장사였기 때문에 총탄 한발에 쓰러지지 않고 호령을 하시다가 세 발을 맞으신 뒤에야 드디어 숨을 거두셨다고 구전됩니다. 고조부는 아들이 청주병영에서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친지간인 충청도 관찰사에게 교섭해서 구하려고 청주로 오셨지요. 그러나 이미 효수를 당한 하루 뒤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드님의 시신을 거두어 강내면 궁현리 정산골에 장사를 지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