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청주에서 교구장을 오래 지낸 최동석, 증손 정일·마을 유지 서정학
대상인물

최동석(崔東碩)

1872~1948. 청주에서 동학농민전쟁 참여. 천도교 청주 교구장을 오래 역임.

증언인물

최정일(崔精一)



1940~ . 증손. 14년간 군생활을 했고, 6년 정도 해외에 있었으며, 이후 중기사업을 하다가 고향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은 이제 5년이 됨. 현재 청원교구장으로 있음.

1930~ . 마을유지.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서 농사 지음.


prw_091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신영우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청원군 북이면 금암리에서 사는 서정학 씨는 동네의 옛일을 잘 아는 유지이다. 서정학 씨가 아니면 19세기 말 대주리와 금암리에서 활동하던 동학 간부들의 면면에 대하여 그 일부나마 전혀 알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최동석은 그에 의해 알게 된 인물이다.

전주 최씨인 최동석 선생은 대주리에서 의암 손병희 그리고 서우순 선생과 함께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셨어요. 가깝게 지내셨지요. 최동석 씨는 체격이 크고 힘이 셌어요. 집 마당에 지금도 커다란 돌이 하나 있는데 마을사람은 누구도 들지를 못했지요. 그런데 그것을 번쩍 들었을 정도로 힘이 장사였어요. 체격이 남달리 크고 걸음걸이가 특이했지요. 그렇다고 우스꽝스럽거나 한 것은 아니고. 그 5대조가 정각이었는데 무당을 정각이라고 했지요. 그것이 싫어서 동학에 스스로 입도한 것 같습니다. 그는 환원할 때까지 천도교 청주시 교구장을 지냈어요. 그의 어머니는 모두 세 분이 있었지요. 생모인 신씨가 일찍 십여 살 때 돌아가시고 금씨 어머니가 그를 키웠는데 효성이 지극하여 금씨가 세상을 떠나자 105일 동안 성묘를 다녀 동네에서 그의 효심을 모두 칭찬했다고 합니다.

청주는 갑오년에 격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청주병영의 관군과 동학농민군이 육거리와 무심천변에서 치열한 공방전을 오래 벌였고, 경군과 일본군이 번갈아 들어온 군현이었다. 동학농민군이 패배한 뒤에도 관군이 동학 근거지를 다니면서 보복을 계속하였다. 그때 최동석이 어떤 활동을 했는가는 잘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족보에는 동학혁명에 참여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접주로 활약한 사실도 동네사람들이 알고 있다. 접주의 첩지는 그의 증손 최정일이 가지고 있다고 한다.

최동석 씨가 접주였다는 첩지를 증손되는 최정일이 보관하고 있지요. 돌아가신 뒤 산소는 가족묘지에 모셨어요. 집안은 부자는 아니었어도 살림살이는 어느 정도 되었던 것 같아요. 최정일의 조부인 최광준 씨는 구장일을 25, 6년 했지요. 상업을 했는데 말을 이용해서 항상 한 달여 이상을 돌아다니면서 장사를 했어요. 최정일의 부친은 일본 유학을 다녀오셔서 교통부에 근무를 했어요. 천도교와는 관련이 깊지요. 증조부에서 조부, 부친, 본인까지 4대가 교구장 일을 하고 있어요. 집안에 증조부가 가지고 있던 고서들이 많았는데 특히 갑오년 당시의 중요한 기록을 쓴 고서가 있다는 사실을 교인들로부터 전해듣고 찾고 있으나 아직 발견하지는 못해 아쉽습니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