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이병인(李秉仁)
1862~1935. 통학에 가담하여 보은집회와 농민전쟁 때 예산 전투에 참가하고 천도교 포교에 힘씀.
이위경(李威卿)
1932~ . 오산에서 전파상, 용산전자상가에서 사업을 했으며 지금은 충주에 칩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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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성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1892년 동학에 입도하여 1893년 보은집회와 1894년 농민전쟁 때 예산 싸움에 참가하였던 이병인, 그의 고향은 경기도 화성군 오산읍 서리이다. 논 700여 평, 밭 1,500평 정도를 가지고 농사를 짓다가 “세상이 이래서는 안되겠다. 조정의 하는 일이 질서가 깨지니까 자발적으로 동학에 입도하였다”고 한다. 손자 위경은 “아버님 말씀에 1892년 2월 11일 보은 장내 집회에 2만여 군중이 모였으나 강제해산을 당하여 한꺼번에 이동을 하다가 죽은 사람이 있었다. 할아버지도 이때 죽은 척하고 있다가 들것에 실려 버려졌는데 살아났다”면서 할아버지가 보은집회에 참가했었다는 아버지의 말을 전한다. 보은집회는 복합상소가 실패로 돌아간 뒤 1893년 3월 11일 보은 장내리에서 열렸다. 복합상소가 ‘교조신원’을 요구하는 것이었다면, 보은집회는 밖으로는 ‘척왜양’, 안으로는 ‘탐관오리의 축출’을 명분으로 내걸었다. 수원·용인의 동학도들은 26일 300여 명이 먼저 보은집회에 참가하였으니 이병인은 이때 함께 갔을 것이다. 보은집회는 3월 28일부터 해산하기 시작하였는데, 경기 수원접의 840여 명과 웅인접의 200여 명은 4월 2일 보은을 떠났다. 『천도교월보』나 증언에서는 병인이 해산당할 때 총에 맞아죽을 뻔하다가 살아났다고 한다. 보은집회가 정부의 위협은 있었지만 해산과정에서 총을 쏘는 따위의 강제 진압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농민전쟁 때는 예산 싸움에 참가했다고 한다. 예산에서는 9월 최시형의 기포령에 따라 대접주 박희인이 동학간부들을 모아 부대를 편성하였다. 동학농민군 수천 명은 10월 1일 태안현과 서산군 관아를 차례로 점령하였다. 10월 23일에는 해미로 나가 면천 승전곡에서 관군과 싸워 승리하고, 10월 26일에는 예산 신례원으로 나가 1백여 명의 관군을 몰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70여 세의 노파가 몰래 관군 대포에 물을 넣어 못쓰게 하였으며, 이때부터 동학군은 대포에서 물이 나오게 하는 조화를 부린다는 이야기가 퍼졌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는 증언에서도 비슷하게 나온다.
예산 전투에 참여를 하셨는데 대포에서 물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관군이 놀라고 도망을 갔다. 동학군을 섬멸하기 위해서 대포를 걸어놓았는데 관군이 잠이 든 틈에 부인네들이 항아리에 물을 담아 부어놓았다. 그래서 화약이 젖게 되었다.
병인은 농민전쟁 뒤에는 체포를 피해 1년 동안 숨어지내고 2년여 떠돌이생활을 했다. 그 뒤까지도 감시는 계속되었다. 뜻이 있어도 감시 때문에 3 1운동에 참가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뒤 병인과 아들 인학은 머리 깎고 포교를 하여 오산 전체가 들끓고 천도교에 호응하였다고 한다. 병인은 만주 쪽으로도 돌아다녔던 것 같다. 손자 위경은 “할아버지가 만주 쪽에 돌아다니셨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자세한 얘기는 모르고 독립운동과 관련이 있지 않겠나”고 추측한다. 할아버지가 1935년에 돌아가고 위경이 7세 때인 1938년에 집안이 서울로 이사를 했다. 이사할 무렵에는 할아버지가 포교활동에 많은 재산을 바쳐 소작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서울에 와서도 병인의 아들 인학은 천도교 총부에 출입하면서 밖으로 나도는 생활을 계속하여 곤궁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증언자는 “아버지가 곤궁해서 한문 선생을 하였지만 밖으로 돌아다니시기를 좋아해 어머니가 살림을 꾸려나갔다”고 한다. 병인의 산소는 고향인 오산에 있다. 묘를 쓸 때 상석을 만들면 집안에 아들이 죽거나 일이 잘 안되어 붓글씨를 써서 함께 묻었기 때문에 석물은 없이 묘만 있다고 한다. 병인이 1935년 돌아갔을 때 『천도교월보』에 짤막한 추도문이 실렸다.
고 서암 이병인 씨는 임진 4월 2일에 입교하시와 계사년에 보은 장래에 가시게 되었을 때 다른 고생하신 것은 이로 소개할 수도 없고 유일한 것은 동행하였던 교인 중에서 질병이 있어서 누운 이를 구하시다 마침 관군에게 실패를 당하야 총에 맞아 두러눕는 그 틈에서 죽은 사람같이 누었다가 그 화를 피하기도 하였고, 또는 그 후 집으로 돌아오셨다가 수원에서 피촉되었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조금 쉬이지 않는 정성으로 수원에서 모든 것을 시설하고저 무한히 힘을 쓰시고 당신의 사재를 기울여 교회를 위하야 희생하였고 모든 것을 차자 인학 씨에게 미루시고 수도하시다가 금년 4월에 환원하섯씨니 참으로 비통함을 마지아니 하나이다(『천도교월보』1935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