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사료 아카이브 로고

SITEMAP 전체메뉴

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송대화와 관련 모진 고문 담한 나시원, 딸 요진
대상인물

나시원

1860경~1933경. 자 원일. 송대화와 관련되어 잡혀 고문 끝에 살아남. 둘째아들은 의병 활동하다 전사.

증언인물

나요진



1911~ . 전북 정읍시 소성면 애당리에 거주.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박준성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전라도 정읍 석산에서 살던 나시원은 송대화와 관련되어 체포되었다가 모진 고문 끝에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그의 둘째 아들은 의병활동을 하다 목숨을 잃었다. 나시원의 딸 요진은 신해생, 1911년에 태어났으니 여든 중반이다.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태어난 정확한 해를 모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때를 “시방 내가 생각하기로는 일흔둘에 돌아가신 것 같은데, 내가 23살에 돌아가신 것 같으요. 그러면 시방 134살인가 133살인가 되었어”라고 한다. 요진이 1911년 태어났고, 이 증언은 1994년에 한 것이니까 나시원이 태어난 때는 1860년 무렵이고 돌아간 때는 1933년 무렵이 아닐까 짐작한다. 나시원은 내장면 석산에서 살았다. 그의 집은 열녀 효자가 여덟이나 난 양반 집안이었고 살기도 넉넉했다고 한다. 풍채는 보통이었지만 12년 동안 독서당에 앉아 글공부를 하고 글씨도 잘썼다고 한다.

양반이었제. 우리 선조가 열녀 효자가 야덜(8)이 났어, 그때는 잘살았다고. 우리 아버지가 열네 살에 장가갈 적에는 정읍 장자라고 군수가 장죽교를 다 내보냈어. 그때는 꼭지가마 타고 둘이 들고 가는 것을 있는 사람은 타고가고, 상사람들은 짚둥우리 틀어서 타고 가고, 벼슬하고 부유한 사람들이라야 장죽교 너이 들고가는 것을 타고 그랬는디. 장죽교를 다 내보내서 타고 장개갔으니까. 그런 살림을 다 망했다고. 보통 풍채지. 참 우리 아버지 글씨를 잘 쓰셨어. 12년을 독서당에 앉아서 공부하셨으니까 물론이지.

그렇게 글공부도 잘하고 살 만했던 나시원 집안이 다 망하게 된 계기가 무엇일까. 딸 요진은 오빠가 ‘독립군’들을 따라나갔다가 죽은 일과 아버지가 송대화와 관련되어 감옥에 잡혀간 일을 원인으로 든다.

애초 우리 아버지가 내장면 석산 태자리에서 살았어요. 거기서 사시다가 우리 아버지가 14살에 장가가서 18살에 큰 아들 낳고, 21살에 작은 아들낳고 그래 갖고는 작은 아들이 24살 때 독립군들을 따라 나갔다가 잽혀서 군산서 돌아가셨어. 그러고 우리 아버지는 고부 관청에서 일을 했는데 거그가 송대화라고도 하고 송대호라고도 하는 이종형이 큰 접주를 했던 곳이여. 그 양반이 접주라서 석산 거시기로 왕래를 한게로, 그리 잡으로 댕기고 성가시럽게 한게 큰 아들 식구는 거기다 두고 고창 도산으로 우리 식구만 어매가 나를 배고 아들 둘 데리고, 네 식구가 도산으로 이사를 갔어. 도산으로 갔는디, 그 송대화가 고창으로, 무장으로, 영광으로, 그리[도산]로 났고, 그래 그 선이 닿아갔고, 저녁이면 여나믄 명쓱 와서 밥을 해먹고 가고 했는데, 하루 저녁에는 한 열인가 와서 자고 갔는디, 아산면으로 일본놈이 들어와서 일본놈을 가서 때려 죽여버렸어. 그래가지구 팍 뒤집어져 갔고는 우리 아버지가 연락을 했든가 어쨌든가, 갔다 오시다가 그냥 잡혔단 말이여. 내장리 고부땅으로 잽혀가 갔고는 열발가락, 열손가락 다 대못짓을 당했대요.

요진이 태어나기 전이었고, 벌써 8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아버지와 오빠가 겪었던 일의 순서가 어떻게 되는지 뒤죽박죽이다. 오빠가 독립군을 따라나갔다 죽은 사건과 아버지가 송대화와 관련하여 잡혀갔던 사건에서 어느 것이 먼저 있었던 일인가? 증언을 바탕으로 짚어 본다. 나시원이 21살 때 낳은 작은 아들이 24살 때 군산에서 잡혀 죽은 것은 1905년 ‘을사조약’ 이후 가까운 때 같다. 그 뒤 내장면 석산에서 고창 도산으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그때는 딸 요진이 어머니 뱃속에 있었다. 요진이 1911년 정월에 태어났으니 이사를 한 해는 1910년인가 보다. 그런데 정읍 석산에 살 때 이종형인 송대화가 왕래를 했고, 고창 도산으로 이사를 간 뒤에도 송대화가 그의 집을 드나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누가[송대화?] 일본놈을 때려 죽인 것과 연루되어 나시원이 잡혀들어갔다. 그때는 뒤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면 1911년 1월 10일이 된다. 송대화와 관련한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내가 시집오기 전에 들었는가 시집 온 뒤에 들었는가 모르겠소. 좌우간 송대화 그 양반이 우리 당숙동네로 들어가서 숨었든가봐. 숨었는디 그리 잡으러 나와서 막 뒤지는디. 어느 때가 되얏등가 얼음을 깨고 그냥 또랑 속으로 들어가서 있었는디, 거기서 바우 위에다 턱을 대고 숨어갖고 있다가는 그 사람들 나간 뒤에 바우에 수염이 딱 얼어붙어갖고 수염이 쓱 빠져 버렸데. 그러고 쫓겨댕겼어. 그러고는 몰라. 말을 들은 게로 송대화가 제일 먼저 전봉준 그 양반을 세웠고, 긍게 일어나기는 송대화가 젤로 먼저 일어나고, 전봉준 그 양반이 나중에 거시기해 가지고는 저 부안으로 백산으로 저리 가짝으로 빴고 송대화 씨는 여기 무장, 고창 저 거시기로 빴고, 그랬다고만 들었어. 아버지가 자금을 대고 그랬대요. 아 밥 안먹고 어떻게 일을 해요. 돈 없이 어떻게 일을 해요. 좌우간 거그다 다 밀어넣어버리고, 돌아가심서 그 설움 받고 돌아가시고.

1893년 거사 모의와 1894년 농민전쟁을 송대화를 중심으로 이해하고 있는 증언이다. 송대화가 얼음 속에 숨어 있다 수염이 빠진 때는 모르지만, 나시원은 농민전쟁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어도 송대화의 활동에 자금을 지원했을 수 있다. 송대화가 1858년생으로 비슷한 또래인데다가 이종형이라고 하니까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렇다면 위의 증언에서 석산 살 때 송대화가 왕래하였다는 것은 농민전쟁 무렵의 일이 아닐까? 그런데 나시원이 고창으로 이사를 온 뒤에도 1910년 무렵 송대화가 나시원의 집을 드나들었고 반일 활동을 했는지 의문이다. 아버지가 잡혀간 뒤 어머니는 어떠했는지 요진의 증언을 더 들어보자.

우리 어머니는 어쨌냐 하면은 우리 아버지가 잽혔다고 헝게 그 사람들 잔방에 가서 글씨 생긴 것이라고는 싹 줏어서 부석장(구들장)에다 집어넣고는 그 사람들 밥해 준 그릇까지 싹 갖다 쳐넣고 거기다가 막 불 사르고 난 게, 마당으로 직독 들어서더래. 들어서 갖고는 왼 집을 막 창질을 해서 막 뒤지드래요. 뒤지고는 그전에 아홉 살 먹은 아들하고, 네 살 먹은 아들하고 우리 어머니하고 마당에다 세워놓고는 아홉 살 먹은 아들보고 자꾸 묻는 것이여. 너그 집에 누가 있냐고. 없다고 한게로 이놈 새끼 안 가르쳐 주면 죽여 버린다고 해서 총알대로 허덕지를 딱 때린께 탁 꼬부라지면서 무섭기는 하고 막 울거 아니요. 우리 어머니 앞뒤다가도 총 대고 막 가르쳐 돌라고, 느그 서방이 여기다가 송대화를 재웠다고, 가르쳐 내라고. 절대 송대화 모른다고, 송대화가 누구다냐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고 막 부인한게로. 아들을 때린게 니는 자식 없간디 때리냐고 헌게, 총개머리로 배를 어떻게 때려버렸지 그냥 기함해 번진 기야. 나는 시방 정월에 날달인디, 뱃속에 가 들고, 배는 불러갖고 탁 꼬부라진 게, 가자고 허고는 가고는 세놈인가 훌타리(울타리) 밖에가 섰드래라, 그래가 저녁밥 먹을 것이다 하고는 앞집 훌타리 개구녕을 뚫고 셋이 그리 도망나와 갖고는, 여그 흥덕 대정리 녹사래가 전주 이씨 우리 어머니 친정인디, 거기를 인자 밤에 아들하고 온게 네 시나 됐더래라. 눈이 그렇게 왔드래. 그래 와서는 들어간 게 우리 외삼촌이 깜짝 놀라면서 어서 밥해서 먹이라고.

여기서도 아버지 나시원이 잡혀가고 바로 저들이 고창 집에 와서 송대화를 찾았다는 이야기이다. 송대화는 농민전쟁 마지막 단계에서 전봉준이 “너라도 살아남으라“는 당부를 받고 나주에서 배를 타고 옥구군 임피로 달아났다. 도피생활을 한 뒤 10여 년이 지나 다시 조심스레 고향에 찾아와 10여 년을 살다가 1919년에 생애를 마감했다고 한다(이이화, 『발굴 동학농민전쟁 인물열전』). 증언대로라면 송대화는 고향에 돌아와서도 1910년 무렵 반일 활동을 하면서 나시원과 연계를 맺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송대화가 고향에 돌아와서 반일 활동을 한 것인지, 아니면 그 무렵 고향에 들어온 것이 탄로가 나서 인연이 있던 나시원의 집을 뒤진 일인지, 그렇지 않으면 송대화와 관련된 일은 그 전에 있었던 것인데 다른 일과 혼동을 하는 것인지 증언만으로는 단정하기 어렵다. 송대화의 행적도 확실하지는 않으므로 지금으로서는 검증할 길이 없다. 요진이 어머니 뱃속에서 태어나기 직전 잡혀 들어간 나시원은 모진 고문을 당했다. 그 뒤 이야기를 계속 들어본다.

정월 초 열흘날 잡혀가서 손가락에 대못질 한게는 얼어가지고 멍멍한게 아픈지 뭣헌지도 모르겠더래라. 열발가락 열 손가락을 다 대못질을 해 갖고는 나중에는 주전자 물을 팍 얼굴에다 들어붓은 게 거그서 죽어버린 게는 땅에다 내려 놓드래라. 내려 놓은게 찬물을 갖다가 몸에다 붓어버린 게는 겉옷이 얼어서 땡땡 가죽드리 (같이) 얼어버리드래라. 그런데 떼메다가는 모다 교인들 잡아다 가둔 데다가 던져버린게는 그 사람들이 붙잡고 막 움서 거시기 해쌓고. 그 추운 디다 갖다 내버렸어도 열이 있응게 옷이 다 마르더래라. 닷새를 물 한 모금 안마시고 그대로 드러누워 있은게 그네들이 이러고 있다가 죽으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우리나라 우리 국가를 찾으려고 이렇게 한 일인디, 뭐 별류 있냐고. 먹어야 한다고, 보리하고 밀하고 콩하고 삶아서 버글버글한 놈의 것을 갖다주면 그 사람들이 손으로 집어서 입에다 넣어 줬어. 그러는디 2월 초열흘날 싹 나오라고 하는디, 훤헌 방에다가 시방 함바집 맨치로 해갔고는 쌀밥을 한 그릇씩 담고, 김치도 담고, 괴기국을 끊여서 주드래라. 그래서 그 놈 먹고 난 게는 괴기 없듯이 엮어갖고는 머리 우게다가 용수 씌워서 주르르 끌고 나가드래라. 끌려 나간께 나시원이는 이리 나오라고. 거기서 끌러는 줬는디, 어떻게 거기서 떨고 섰은게, 툭 밀큼서(밀면서) 싸게 가덜 안하고 왜 그렇게 섰냐고 그냥 툭 밀클드래라. 그래서 그전에 쪼작쪼작 부서진 발로 듣고 강게, 너는 죄없은게 어서 너희 집으로 가라고. 가라 소리를 들은게는 아랫도리가 다 죽어서 벌벌 떨고 섰다가, 싸게 나가라닝게 왜 안가냐고 거기서 악을 써서는 그저 삐척삐척 나와 갖고는.

나시원은 겨우 목숨을 이어가지고 풀려나왔다. 하지만 감옥에 잡혀 있던 다른 사람들은 한꺼번에 처형을 당했다. 그는 기다시피 오다가 멀리서 치떨리는 광경을 지켜 보았다고 한다.

고부 향교가 방죽 가운데가 있습니다. 그런디 그 앞에 나온다치면 여그 앞산맹키로 생겼어. 거기서 이렇게 쭉 나오다치면 여기 구분뎅이가 있는디, 거그로 본게로 멀쩡한 사람들을 꼭 70명이라고 혀. 유지기를 씌워서 거기다 주르르 앉혀놨더래라. 나도 저렇게 죽을텐디. 우리 한아씨 덕인가 하느님 덕인가 모르것다고 그러고는 거기서 퍽 주저앉아서 봉게, 쪼개 있응게 그냥 쿵쿵궁쿵 한바탕하더만은 어이다가 뫼얐는가 어쨌는가 석유를 찌크렀는가 뭣을 찌크렀는가 옆에서 막 불을 지르는디 꼭 시방 폭탄던진 놈 퍼올리듯기 폭 내가 솟드래라.

그렇게 살아돌아온 나시원은 부인과 다시 입석리에 방을 얻고 살았다. 잡혀 들어가기 전 살던 집은 3년 뒤에 가보니 똥도 없을 정도로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고문당했던 손발은 손톱발톱이 다 빠져 끄트머리가 말짱 봉봉해져 일을 하기도 힘들었다. 먹고 살길이 막막했다. 부인이 어린 요진을 업고 진장리 정남풍네 집에 가 밥을 해주고 밥을 얻어다 먹으면서 7년을 살았다. 그 세월 이불도 없이 지냈다.

낮에 먹는 밥 한 그릇, 저녁에 주는 한 그릇 처대기에다 싸놓고, 또 일꾼들이 먹고 남은 놈 거기다 붓고 반찬 쪼개허갖고, 나 치마 벗어 업고, 밥 들고 오리나 되는 디서 와 갖고 세 식구를 멕이구 7년을 받아 먹었어. 그 일곱살이나 먹은 가시네를 뭣허러 데리고 댕긴냐 헌게 무서서, 저녁이면 올라면 무서워서 도랑도랑해서 데리고 댕긴다고 그렇게 해서 우리 어매가 그렇게 고생을 하고 내가 여덟 살, 아홉 살 먹도록 이불이 없이 살았당께.

그 뒤도 가난과 고통이 이어지는 생활이 계속되었다. 요진의 어머니는 나시원의 재취였다. 나은 자식이 셋인데, 요진이 태어날 때 아홉 살 되던 첫째아들은 아파서 시름시름 않다가 죽고, 네 살되던 둘째아들은 돈벌러 간다고 집을 나가서 소식이 끊어졌다. 남은 요진은 열입곱에 시집을 갔다. 고생하던 요진의 어머니는 시집 간 딸 집에 와서 살다가 열 달 만에 돌아가셨고, 아버지 나시원은 큰어머니의 큰아들한데 가서 살다가 돌아가셨다. “실성실성 정신이 없이 돌아다니다가 말은 거리에서 돌아가셔서 데려갔다”고 한다. 요진은 시집 와서 “어찌케 곤란시럽게” 살았다. 4남매를 낳았는데 첫째는 스물일곱에 잃어버리고, 작은아들은 뭔 일만 하면 실패를 보다 폐인이 되었다. 요진은 일흔세 살까지 농사를 지었지만 그 뒤는 남주고 농사를 안 짓는다. 이제야 이렇게 아버지와 오빠가 했던 일이며 그 뒤 기구한 생활을 털어놓고 이야기하지만, 요진도 오랫동안 그 일을 입다물고 살아왔다. 독립기념관을 가보고 나서야 말을 할 수 있었다.

쥑일까 무선게 얘기들도 안하고. 아 나도 당최 하지 말라고 허드랑게. 자꾸 허면 죽는다고. 우리 사종시아제가 기념관 있는 디다가 공장을 지어놓고 기념관 구경시켜준다고 들어가갖고, 거기 주전자 물씌고 그런 걸 보고, 아이고 우리 아버지도 저렇게 죽었는디, 우리 오래비도 저렇게 죽었는디. 아이고 어디 가서 항의를 해. 얘기허지 말라고 해서 순전히 얘기를 안했다가 독립기념관 갔다와 갖고는 그 얘기를 했당게. 순전히 입밖에 내지를 않았는데.

요진은 독립기념관을 갔다오고 나서 의병 나갔다 죽은 오빠의 묘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이 더 분통하다고 한다. 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제대로 돌보지 못해 군산군청 지을 때 그냥 쓸려버렸다.

우리 오래비가 스물세 살에 나가서 군산가서 잽혀갖고 죽었당게. 그래서 우리 큰오래비가, 밤에 죽여서 거시기 했다고 가져가라고 항게 혼자 가서 거적에다 몰아가지고 띠빵 걸어서 지고. 어디 가까운 디다가 묻었든가. 당신이 댕기면서 풀이라도 뜯고 어쩌고 했는디. 당신이 중간에 아들이 일본에 잽혀가 가지고는 있다가 어떻게 그냥 휴가 나왔등가 나와갔고는 그냥 아버지 데리고 일본에 들어가 버렸어. 그래서 10년 만에 일본서 나왔는디, 그 뒤로 거기를 쓸어버리고 군청지었다고 합니다. 군산군청 자리. 우리 오래비는 뼉다귀도 없어.

죽은 작은오빠나 큰오빠는 큰어머니 자식들이다. 요진은 어렵게 살다보니 아버지 탈상하는 데 가보고는 제사 한번 지내러 못간 세월을 서러워 한다. 그의 살아 있는 동안 가장 큰 바람은 큰오빠의 손자들(아버지 나시원의 증손자)을 찾아서 아버지 살았던 이력과 제사를 전해주고 가는 일이다.

시집이라고 없는 집에 와 가지고 어찌케 곤란스럽고 거시기 하든지, 아버지 제사 지내러도 이제까지 한 번도 못 갔어. 아버지 돌아가신 뒤로 포도시 탈상하는 디 가보고는 이렇게 제사 한 번 지내러 못갔어. 그런디 인자 당신 증손자가 넷인디, 어디가 서울로 다 기어올라갔는디 어디가 사는지 몰라. 찾아야겠는디. 제일로 시방 찾아야 쓰겄어. 찾는 것이, 이렇게 해놓았은게 끄트리까장이라도 너그들이 이 한아씨 모셔라 하고. 당신 손주께 다가 전장(전달 ?)해 버리고 가야지. 내가 이렇게 해놓고 나 죽어버리면 무슨 소용이 있겄소. 증손자가 찾아서 해야지.

여든여섯인 요진의 증언은 그가 태어나기 전의 일은 전해들은 것이고, 살면서 경험한 일도 세월이 오래되어 앞뒤 기억이 뒤섞이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가 들려주는 아버지, 어머니, 집안식구들의 모진 생활은 그들이 살았던 아픈 역사와 함께 구구절절 눈시울을 적시게 만든다. 이 증언록이 계기가 되어 그의 마지막 바람이 꼭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문화체육관광부 전라북도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