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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장흥에서 의병 활동을 한 백율인, 증손 명칠
대상인물

백율인(白律寅)

1887~1951. 장흥에서 의병 활동.

증언인물

백명칠



1946~ . 본명은 금석(金石). 콤바인과 트랙터로 위탁영농과 자작농업 병행.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박준성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장흥에서 600~l,000명을 이끌고 의병활동을 했던 백율인은 장흥 용산면 송전리 초당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살 만했다고 한다. 당시 초가집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때는 하인들이 많이 있고, 말도 타고 다니고 그랬대요. 몇 석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먹고 살 만했대요. 집이 토방이 굉장히 높아요. 밑에 하인들이 앉아있으면, 위에서 내려다 보게끔 집 구조가 되어 있어요. 지금도 그집이 그대로 있어요.

백율인은 서당에서 공부를 하였고, 16살 때부터 의병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증언자 명칠의 할아버지, 아버지보다 의병 활동을 했던 증조할아버지 율인이 더 오래 살았다. 그렇지만 증조도 명칠이 어렸을 때 돌아갔다. 그래서 집안 어른들에게 의병 활동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없었다. 증조부 얘기는 작은고모가 좀 알고 있어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작은고모는 강진군 칠양면 영동리에 살고 있다.

작은 고모님이 계신데 조금 알거든요. 그분이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놔서 얘기를 잘 못들었는데, 고모님한데 얘기를 들어보면 옛날에 갑옷을 입었는데, 지금 초당이라는 부락 뒤에 가면 집 뒤에다 갑옷을 묻어놨다고 그래요. 땅 속에다가. 방공호로 파진 것을 우리가 어렸을 때 그 굴을 몇번 들락날락 했거든요. 고모님 말씀이 옛날에 한 600~l,000명 정도의 부하를 거느리고 운동을 하셨다고 얘기를 하셨죠. 그는 힘도 셌고 날카롭게 생겼지만 정의감이 투철하였으며 인정도 많았다고 한다.

일꾼들을 데리고 짚을 이게 되면 마람을 사람이 지고 올라가거든요. 그런데 증조부님은 힘이 좋으셔가지고 그 마람을 마당에서 바로 던지면 지붕꼭대기까지 올라가고 그랬지요. 수염이 배꼽까지 내려왔어요. 지금도 집에 사진이 있지요. 예쁘게 생겼으면서도 눈매가 날카롭게, 조금 엄하게 생겼지요. 사람이 또 인자하시고, 내가 알기로는 넘의 보증을 많이 서셨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술을 좋아하셔서 너무 도장을 많이 찍어줘가지고 그 뒤로 살림이 많이 나갔어요. 내가 알기로 산 같은 거 토지 같은 것이 넘 보증을 서줘가지고 많이 없어졌다고 들었어요.

백율인은 의병활동을 하다 잡혀 죽을 뻔했지만 살아나 남산 면장까지 지냈다고 한다.

옛날에 이런 말을 들어 봤어요. 죽일라고 산으로 데리고 갔는데, 수염이 배꼽까지 내려왔는데,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때려도 눈물만 뚝뚝 떨치고 얼굴 하나 안 찌푸리고 있으니까 이런 사람을 죽이기 아깝다 해서 살려줬다는 말을 들었지요. 그래가지고 그 뒤로 남산 면장도 하시고, 옛날에는 용산면이 남산면이었거든요.

남산 면장을 했던 때가 일제시기인지 해방 뒤인지 확실하지 않다. 일제시기였다면 600명 이상을 거느리며 의병 활동을 하던 그가 어떻게 면장을 지낼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증조부 유품이 책이랑 이것저것 많았는데 어른들이, 증손 명칠이 어렸을 때, 다 돌아가니까 동네사람들이 가져가버렸다고 한다. 옆에서 듣고 있던 증언자의 부인이 거드는 이야기이다.

이 양반은 어리고 우리 시아버님은 얼른 돌아가시고낭께. 동네사람들이 다 돌라가불고 벼루 딱 이거 하나 남았어요. 그 증조부님이 썼던 옥벼루요. 진짜 옥벼루. 칼도 갈았고 그래요. 이 양반은 어리지요. 인자 집주인은 없지요. 책이고 뭐고 다 돌라가부렀어요.

하나 남은 유품인 옥벼루를 어루만지며 인자했던 증조부의 모습을 떠올린다. 할아버지, 아버지가 먼저 돌아가시고 어렸을 때 집안에 남자 어른이라고는 증조부뿐이었는데….

사람이 또 인자하시고, 옛날에는 어렸을 때 가래고쟁이라고 입었은게, 나도 어렸을 때 그 옷을 입고 컸거든요. 그런데 까딱 하면 오줌을 옷에다 싸버려요. 그러면 할머니는 매를 때리고 그 증조부님은 그 옷을 벗겨다가 빨아가지고 횃대에다 널어놓고 그런 기억이 나요. 또 그 저 화로에다 마늘을 구워가지고 나를 줬어요. 내가 3대 독자거든요. 그때가 한 6~7살 정도 됐을 거예요. 그런데 열 살 넘어서는 기억이 안 나요. 언제 돌아가셨는지도 모르겠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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