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서병환(徐丙煥)
경상도 산청에서 의병 활동.
서홍석(徐弘釋)
1924~ . 행정공무원을 하였음.
박준성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경상도 산청에서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가까스로 살아났다고 하는 서병환. 그는 그 뒤에도 체포될 위험 때문에 숨어다녀야 했고, 총맞은 뒤탈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쪽 팔도 못 썼다. 손자 홍석은 대여섯 살 때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한다.
우리가 알기로는 그때 대여섯 살 정도 먹었으니까 말소리 정도는 알아듣는데 좀 정상적이 아니셨지요. 가슴에 총 맞아서 그렇고 한쪽 팔도 잘 못 쓰셨어요.
그는 할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모습만 생각날 뿐 어떻게 의병활동을 했는지 들은 기억이 없다. 좀더 철이 들었을 때 할머니가 들려주던 할아버지 이야기가 일부 떠오를 뿐이다. 할머니는 그가 스무 살 때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자기가 고생한 얘기, 통상 할아버지가 집 모르고 사회활동, 의병활동 하시다 고생이나 시키다가 결국 왜놈들한테 말하자면 요시찰 인물이지요. 요시찰 인물로 돼가지고 맨날 쫓겨다니다가 결과적으로 잽혀가지고 총살당해 가지고 죽었는데 초상칠라고 가보니까 살아있는 거요. 그래서 살린 거요. 할아버지는 평생 그렇게 사신 분이여.
남편의 일이 아무리 뜻있고 훌륭하더라도, 그 때문에 온갖 고통을 온몸으로 견디면서 살아야 했던 부인은 고생스럽고 한스럽던 기억이 더 남게 마련이다. 그 뒤 시대가 그런 일을 내놓고 떳떳하게 자랑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더 그렇다. 홍석의 할머니도 마찬가지이다. 남편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 정확하게 언제 잡혔는지 따위는 손자에게 들려줄 중요한 이야기거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몇십 년이 지난 뒤까지 남는 기억은 남편이 죽다살았던 사정과 그 뒤 고생한 일들이다. 그래서 홍석은 할아버지 병환이 의병활동을 하다 잡혀 죽을 뻔한 때가 언제인지 들어보지 못했다. 병환은 손자 홍석이 국민학교 입학하기 전 대여섯 살쯤 되었을 때 환갑을 지내고 돌아가셨다고 한다. 홍석이 1924년생이니까 1930년 무렵일 것이다. 그렇다면 농민전쟁 때는 20대 중반이고 1905년 ‘을사조약’을 맺을 때는 30대 중반이었다. 이렇게 따져보아도, 나이만 가지고는 병환이 농민전쟁에도 참여했는지 그렇지 않은지 알기 힘들다. 손자 홍석도 “그런 거는 모른단 말입니다. 내 자신이 모르고 내가 들어보지 못했고, 누가 얘기 들은 사람도 없고 본인 밖에 모르는 거지”라고 한다. 그런데 홍석의 아버지가 살아계셨으면 백몇 살이라고 하고, 총 맞았다가 가까스로 살아난 할아버지를 할머니가 업고 두 아들 딸을 데리고 지리산을 넘었다하고, 아버지가 열몇 살 때부터 쫓겨다니다가 공부를 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를 모아보면 일본군에 병환이 잡혔을 때는 의병전쟁 무렵으로 짐작된다. 병환은 인물 좋고 키도 크고 점잖았으며 한학도 좀 했다고 한다. 그가 의병 모집하고 나돌아다니다 보니 그나마 많지 않던 집안 살림이 제대로 남아 있을 리 없었다.
근게 우리는 그때는 뭐 어려서 인상을 봐서는 키도 크고 점잖하시고 이래요. 인물이 좋다고 그러지. 키도 날씬하고. 재산은 의병활동하기 전에는 내가 잘 모르겠고 그 당시에 촌 재산이 별거 있었겠어요? 웃대는 말하자면 그 할아버지 웃대는 전부 다 농사지었지요. 병자 환자 할아버님은 한학도 좀 하시고 집안일을 안 돌보시고 의병모집도 하고. 지금 같으면 사회활동을 하는 거지. 근게 집안의 살림이 온전할 수 없지.
의병 활동을 하면서 재산이 줄어들기 시작했을 거라는 말이다. 의병 활동이 어떠했는지는 모른다. 어떻게 활동을 하다가 일본군에 잡혀 총살을 당했는데, 죽은 줄 알고 홍석의 할머니가 시체를 찾으러 가보니 목숨이 붙어 있었다. 할머니는 남편을 둘러업고 살길을 찾아 지리산을 넘어 전라도로 갔다.
할아버지가 결국 여기서 산청에서 의병활동을 하시다가 간단하게 얘길하자면 일본놈한테 체포돼가지고 거서 총살을 당한 거예요. 할아버지가 총살을 당했는데 할머니가 가보니까 죽지를 않았더라는 거예요. 시신이나 찾아서 초상이나 치르겠다고 갔는데 죽지를 않았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총맞은 할아버지를 업고 지리산을 넘어서 전라도로 간 거요. 할머니가 어린 아들 자식들 데리고 말이지. 내한테는 아버지하고 작은아버지, 고모 셋인가 데리고 지리산을 며칠 걸려 넘어간 거지요. 시천면에서 지리산을 넘어 전라도로 가신 거지. 그래가서 전라도서 넘의 집 접방살이로 해서 별 희한한 일을 다한 모양이야. 그래가지고 결국 살아나신 거지.
총에 맞은 남편을 둘러업고 두 아들과 딸을 이끌고 지리산을 넘어갈 정도면 할머니도 힘이 대단하였던 것 같다.
우리 할머니가 참 대단한 분이시지요. 힘이 장사예요. 보통 장정 하나쯤이야…. 그 당시 우리 알기로 동네에서 [할머니] 갈굴 남자가 없었어요. 그정도로 힘도 좋고 무서운 것도 없고.
그러나 전라도에서도 편히 지낼 수 없었다. 숨어 살아야 하니까 40여 번이나 이집 저집을 옮겨 다녔다. 병환은 몸이 낫자마자 숨어 살아야 했고, 가족은 그곳에서 살 수 없어 다시 경상도 사천으로 이사를 왔다. @할머니가 아 셋을 데리고 올데 갈데 없으니까 전라도 가서도 이사를 한 40번 댕긴 모양이여. 살 데가 없으니까 왜놈 때문에 결국 오래 살지 못한 모양이여. 결국 할아버지는 낫자마자 붙잽히면 죽으니까 나가뿌렀고, 할머니와 올 데 갈 데가 없으니까 사천 골뱅이란 데로 갔어요.
이사를 와서도 병환은 계속 피해 살아야 하는 처지였다. 끝내 작은 아들이 아버지를 처형 명부에서 빼내고 대신 보조헌병을 하는 조건으로 도피생활을 마칠 수 있었다.
작은아버지한테 보조헌병을 하라니까 나는 일 못하겠다. 최소한 우리 아버지를 처형 명부에서 빼라. 그라믄 내가 보조헌병이 되겠다. 그 조건을 일본사람들이 들어준 거여. 그래서 결국 우리 할아버지를 자기들 말로 하면 잡아죽일 대상인데 결국 빼분 거여. 그 당시 대구에 가 있었는데 대구에서 진주로 보내준 거여. 진주 가면은 명부가 있으니까 헌병대에서 명부를 넘가주면서 같이 가져가서 없애달라 그래라. 그래서 헌병대장한테 연락을 해가지고 할아버지는 자유로이 왕래도 되고 같이 살게 된 거지. 그때부터 삼춘은 보조헌병 역할을 한 거지. 그런게 삼춘으로 인해서 집안이 다 살게 되었다고. 결국 말하자면 우리 삼춘이 효자지. 그렇지만 당시는 긍께 비열하게 반역자가 된 거여. 떳떳하지 못하다 이 말이여. 첨에는 나라를 위해 일을 했다고 볼 수 있는데 끄트머리에 가서는 살기 위해서 그렇게 결국 됐다 이 말이여. 긍께 내가 떳떳치를 못하다, 이런 얘기를 하는 거여, 지금.
작은아버지는 보조헌병 노릇하여 할아버지를 살렸으니 효자이지만 살기 위해서 반역자가 되었으니, 홍석은 그것이 떳떳하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몇 번이나 반복한다. 아버지를 살리는 대신 헌병보조원 노릇을 하던 증언자의 작은아버지는 뒤에 면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우리 삼춘은 왜놈 밑에서 어깨 너머로 배운 거요. 말하자면 끌려 대니면서 자기가 재주가 있고 그라니까 어깨 너머 글도 해우고 일본말도 잘하고 그러니까 통역도 시키고 다시 가두고 이런 식으로 했는 모양이여. 십몇 년을 끌고다니면서. 그 당시는 그로 인해서 면장도 하고 관계생활을 했다 말입니다. 내가 7살에 국민학교 입학을 했어. 그때는 7살에 학교 간 사람이 없었는데 삼춘이 면장을 했으니까 억지로 7살 먹어서 국민학교에 갔어.
작은아버지가 면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모르지만, 홍석이 국민학교 들어갈 때 면장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때는 1931년 무렵이었다. 할아버지는 바로 전에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홍석의 아버지가 할머니 외가가 있던 사천 곤명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할아버지를 모셨다. 홍석이 유족회에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은 것은 고향사람들이 할아버지 한 일을 알고 유족회에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안이 어떻게 해서 여와서 살게 됐다는 걸 고향사람들이 안다 말이지. 긍게 동네사람들이 이래이래 한단다 하니 신고를 하라 그래. 옛날에는 누가 아는 사람이 없으니까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사천 곤명 사람들이 우리가 어떻게 여와서 살게 된 것을 다 알고 있으니까 그 연락을 해준 거지.
증언글 통하여 의병활동 뒤에도 계속 어렵고 힘든 도피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던 식민지시기의 어려운 형편과 총에 맞아 말도 제대로 못 하고 팔까지 못 쓰는 지경인데도 ‘네 아버지 살려줄 테니 보조헌병하라’고 위협했던 일제 침략자들의 간교함, 또 억지로 끌려들어간 뒤 식민지체제에 순순히 따라갔던 또 하나의 인물상을 볼 수 있다. 여기서도 뼈아픈 근현대 가족사를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