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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동학 접주와 의병장이었던 임광재, 손 동설·증손 선혁
대상인물

임광재(任光宰)

1880. 1. 23~?. 일제시대 풍천(豊川) 임씨. 자는 경재(景在).

증언인물

임동설(任東卨)



1934. 7. 5~ . 농업.

1961 1. 29~ .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 바른역사인식과 실천을 위한 모임(바실모) 회원으로 역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학원 강사로 일함.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배항섭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임광재는 임헌도(1846~1896)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임헌도 때까지만 하더라도 종가집이었고 재산도 꽤 있었고 노비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글공부에는 뜻을 두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자세한 이야기는 모르겠습니다. 광자 재자 할아버지가 결혼할 때 보낸 사주단자가 저한테 있는데 사주에 생년월일이 적혀 있지 않아요. 그리고 전해오는 이야기로 짐작컨대 학문을 많이 하신 것 같지는 않더라구요.

임광재는 타고난 기질이 괄괄하였고 고집이 세었다고 한다. 그래서 문중 어른들로부터 경계를 받기도 하였다.

증조부님은 원래 주산면 황률리 앞마실에서 사셨고, 의병활동으로 가세가 기운 뒤 금암리 614번지로 이사하였고, 그곳에서 일제시대에 돌아가셨습니다. 증조부는 덩치가 컸고 힘이 장사였으며, 또 상당히 성격이 다혈질적이고 과격하고 자기 고집대로 하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그분 앞에서는 하도 무섭고 엄하여 함부로 말도 못했다 하니다. 고조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주산 주렴산의 명당터라는 곳에 밀장을 하시고 고조할머니인 보성 오씨가 돌아가시자 산소를 임가 가문에서는 행세께나 한다는 사람들이 들어가는 대금당에 산소를 썼습니다. 그 뒤 증조부는 문중회의 때 종아리를 맞으셨대요.

임광재는 동학 접주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농민전쟁에 가담하였는지는 불분명하다.

용자 순자 할아버지(己酉生 1909. 2 6) 말씀이, 이분은 가세가 기울어 전혀 공부를 못하셔서 성함도 못 쓰는 무학자이신데 할아버지께서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 증조할아버지께서 동학 접주였다는 말씀을 하시더라구요. 구체적으로 어떻게 동학 접주가 되셨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동학 접주란 말씀을 분명히 하셨어요. 우리 할아버지는 동학 접주이시고 의병 활동하신 것이 나라의 큰 죄인 줄 알고 말씀을 안하시다가 그때서야 조심스럽게 말씀을 하셨어요. 제가 이상해서 여러번 여쭤보았지만 너희 증조부는 동학 접주이셨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동학접주로 활동하였다는 부분은 구체적인 활동내용이 명확하지 않지만, 병오년(1896)에 의병활동을 한 것은 분명한 듯하다.

증조부께서 의병 활동을 하시면서 의병꾼들을 모았는데 할아버지의 증언에 의하면 머리에 흰 두건을 두른 사람들이 와가지고 한 마당에 가득 찼다고 합니다. 모독일지 모르지만 제가 보기에는 증조부는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재산을 의병 활동으로 많이 탕진하셨어요. 그런데 왜 의병 활동에 가담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어요. 희자 재자 할아버지(1896년생)가 증조부님보다 나이가 열몇 살 정도 적은 거죠. 이 양반이 열 살 내외 되었을 때 증조부님 본 이야기를 하시는데, 보령군 주산면 황률리에 성황당이 있는 데서 십여 명의 의병들(흰두건을 두르고 죽 창을 든)에게 일장연설 하는 것을 들으셨대요. 증조부가 나이어린 너는 가라며 희재 할아버지를 보냈대요. 그 뒤 일단의 의병들은 주산면 황률리에서 간치로 갔어요, 웅천으로 빠지는 길인데 그쪽으로 나가셨대요. 제 생각에 홍성, 남포로 가지 않았겠냐 싶고, 이 이야기는 희재 할아버지가 우리 아버지한테 말씀하신 것을 전해들은 겁니다. 임동설의 증언에 의하면 만주에서 활동을 했다고 했으며, 증조부가 의병 활동을 하시면서 누구한테 쫓겼는데, 구체적으로 관군인지 일본군인지는 모르겠어요. 집에 오지 못할 형편이기 때문에 독자임에도 불구하고 딸 하나밖에 못 두셨대요. 증조모는 증조부에 대해 말하는 것조차 싫어하여 기록을 전혀 남기시지 않으셨대요. 그 할머니 성격이 무척 괄괄하여서 동학이나 의병이란 얘기만 나오면 말도 못하게 하셨대요. 딸 한 분 데리고 사셨는데 딸에 대한 애정은 남다르셨던 것 같은데 양자로 들어오신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별로였던 것 같애요. 또 의병들에게 밥을 해먹이느라고 증조모가 무척 고생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증조모는 재산을 탕진한 남편과 의병이라고 하면 거부하신다 그러대요. 증조부님이 의병 활동하시면서 그 재산을 탕진하셨대요. 그래서 증조모께서 스트레스를 받은 거죠. 재산은 모두 증조부대에서 없어진 거고 양자로 가신 용자 순자 할아버지는 거의 상속받지 못하셨죠. 무엇인가 하나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주 조그마한 밭뙈기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증조모가 길쌈을 하셔서 모은 돈으로 마련한 것입니다.

임광재가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초상마당에 사람들이 가득 모였으며, 그 중에 반은 의병꾼들이고 반은 빚쟁이들이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임광재가 이렇게 동학접주로, 의병으로 활동한 덕분에 그의 후손들은 가난에 시달려야 했다.

용자 순자 할아버지의 성장 과정은 아주 비참할 정도로 남의 것을 얻어 잡수시면서 어렵게 사셨는데, 할아버지하고 아버님의 노력 때문에 현재의 재산이 있는 거예요. 시골에서는 어느 정도의 재산을 일궜다고 하거든요. 아버님은 보령시 주교면 928번지 팔봉이라는 곳에 사십니다. 아버지는 간척지를 개간하면서 이사오셨습니다. 증조부의 생가는 없고 생가터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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