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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록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이 증언록은 역사문제연구소가 발간한 『다시피는 녹두꽃』(1994)과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1997)을 원문 그대로 탑재한 것으로
동학농민혁명 전공 연구자들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의 유족을 직접 만나 유족이 증언한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의병 활동을 하다 무장 전투에서 전사한 정가원, 자 재주
대상인물

정가원 (鄭可源)

1889~1908. 고창에서 태어나 의병활동을 하다 무장 전투에서 전사.

증언인물

정재주(鄭在柱)



1932~ . 본명은 갑주. 젊어서 건축사업 했고 지금은 침술 관계 일을 하고 있음.



가계도
가계도 이미지
정리자

박준성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내 용

의병 활동을 하다 스무 살 젊은 나이에 목숨을 잃은 정가원이 태어난 곳은 고창군 성속면 산수 1구이다. 지금도 그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방이 3칸이고 부엌과 광, 사랑채를 합하여 대략 6~70평이 되는 크기이다. 마을은 70~80집 가운데 진주 정씨 절제공파가 50여 집에 이르는 집성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머슴을 두고 농사를 지었으며 고향 마을뿐 아니라 무장 법성포에도 논이 있었다. 양아들로 간 조카 재주(본명 갑주)의 증언을 바탕으로 정가원의 의병활동과 죽음을 정리해본다. 정가원은 14~15세까지 머리를 따고 서당에 다녔다. 키가 9척이었고 힘이 장사였으며, 일본군이 들어오면 마을사람들이 산으로 피난을 가는데 혼자 마을로 내려와서 깊은 산까지 곡식을 져 날랐다고 한다. 그의 별명은 선봉자였다. 사상이 뚜렷하고 마을 일에 앞장 서 붙여진 것이다. 그런 그였으니 나라가 위기에 놓였을 때 의병에 뛰어든 것은 당연하다. 그의 집에는 밤이면 여러 사람이 드나들었다. 무장에서도 왔다가고 연락이 오면 집을 나가곤 하였다. 그는 의병에 참가하고 있을 때 아버지가 주선하여 결혼하였다. 혼인 날짜를 잡은 뒤에도 일본군 감시가 심해서 낮에 혼례를 올리지 못하고 밤중에 몰래 치렀다. 부인은 광산 김씨로 대산면에서 시집을 왔다. 그는 혼례만 치르고 다시 집을 나섰다. 부인이 남편 정가원의 얼굴을 잠시 본 것은 결혼 3일 만이었다. 남편이 밤에 찾아오자 밥을 지어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때 남편의 얼굴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다. 그러나 가원은 밥도 다 먹지 못하고 뒷담을 넘어 대밭 사이로 도망쳐야 했다. 밤늦게 굴뚝에서 연기가 솟자 이를 수상하게 여긴 일본놈들이 쫓아와 대문을 두드린 것이다. 그렇게 떠난 남편 소식을 2~3일 뒤 인편으로 전해들었다. 무장면 군일작전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것이다. 가원의 부모와 부인이 주검을 찾으러 갔는데 시체가 너무 많은데다, 죽은 지 며칠이 지났고, 납으로 만든 총알을 쓰던 시대라 총을 맞은 주검이 시커멓게 되어 얼굴을 보고는 구별할 수가 없었다. 부인이 속옷을 보고서야 주검을 옮겨올 수 있었다. 산소는 고향마을 근처 용암동 고산(봉우리가 다섯 개라 오봉이라고도 함) 밑에 썼다. 가원의 아버지 종하는 아들의 장례를 치른 뒤 홧병으로 돌아갔다. 일제 식민지시기에 가원의 동생 기원(1895~1944)은 흥덕 저수지를 만드는 데 관계하였다. 기한 안에 저수지 공사를 마쳐야 하는데 일본에서 지원이 어렵게 되었다. 그러자 일본인들이 그에게 50%의 재원을 투자하여 공사를 맡아하도록 하였다. 그런데 90%쯤 일이 돼가고 있을 때 공사를 책임져야 할 일본인들이 귀국해버렸다. 이에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일꾼들이 기원에게 매달렸다. 그는 이를 갚아주기로 약속하고 집안의 논과 밭을 모두 팔아서 해결하였다. 그 뒤 그도 홧병으로 돌아갔다. 시집 와서 남편 얼굴을 단 한 번 보고 청상이 된 부인(1887~1956)은 조카 갑주(재주의 본명, 증언자)를 양아들로 받아들이고 평생 수절하였다. 길쌈 솜씨와 음식 솜씨가 남달라서 이름이 났으며, 길쌈으로 양아들을 길렀다. 증언자 재주는 이러한 양어머니의 은혜를 마음 깊이 간직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양모의 산소 앞에 열녀비를 세우기를 절절히 소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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