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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정보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영암관아 동학농민 집강소터 (영암군 영암읍 군청로 영암군청)
  • 지 역
  • 전남
  • 주 소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 158(영암군청)
  • 문화재
  • 분 류
  • 점령지
  • 정 의
  • 영암일대 동학농민군의 집강소가 설치되었던 곳
관련 역사적 사실
영암지역의 동학교도가 1893년 보은집회에 참여한 사실은 「취어」를 통해 확인이 됨. 당시 영암의 동학교도는 무안 대접주 배상옥 휘하에 있었던 것으로 보임. 1894년 5월 8일 전주화약 체결 이후 전주성에서 철수한 동학농민군은 각지에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활동을 전개하였는데 영암의 동학농민군들도 영암관아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폐정개혁활동을 전개함
영암의 동학농민군은 인근 지역 동학농민군과 연합하여 활동하였는데, 손화중과 최경선이 이끄는 광주 동학농민군, 오권선의 나주 동학농민군, 배상옥의 무안 동학농민군, 함평 및 해남일대의 동학농민군과 함께 나주성 공략에도 가담함
그러나 나주 수성군의 완강한 저항에 밀려 후퇴하게 되고 1894년 12월 15일에는 이인환, 이방언이 이끄는 장흥 동학농민군, 보성, 강진, 해남 일대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장흥 석대들 전투에도 참여하였지만 실패로 끝남
이후 영암 동학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에 의해 대대적인 체포와 처형이 벌어지는데, 1894년 12월 19일에는 접주 주성빈(朱成彬), 강군오(姜君五), 김순범(金順凡), 정용달(鄭用達), 김순천, 김권서(金權西), 박맹룡(朴孟龍) 등이 체포되어 처형됨
이때 처형된 농민군은 ‘해남 250명, 강진 320명, 장흥 300명. 나주 230명이고 기타 함평, 무안, 영암, 광주, 능주, 단현, 순창, 운봉, 장성, 영광, 무장 각지에서도 모두 30~50여 명의 잔적을 처형하였다’고 함
고증내용
「취어」: 1893년 3월 29일 탐지하여 30일 보고함. 하나, 9시에 장색이 보고한 내용에는 “성주(星州)·선산·김산·상주 등지의 사람 36명 정도가 나갔고, 장수(長水)의 황병원(黃丙元) 등 130여 명과 영암(靈巖)·무안(務安)·순천(順天)·인동(仁同)·지례(知禮) 등지의 사람 260여 명이 깃발 세 개를 세웠는데, 한 곳에는 ‘호수부의(湖水赴義)’ 라고 글을 쓰고, 한 곳에는 ‘호장대의(湖長大義)’ 라고 쓰고, 다른 한 곳에는 ‘호남수의(湖南水義)’ 라고 써서 차례대로 들어왔습니다.
「취어」: 선무사가 다시 장계함. 어윤중이 겸임. 초 3일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돌아간 사람은 전라도에는 장수접(長水接)이 230여 명, 영암접(靈巖接)이 40여 명, 나주접(羅州接)이 70여 명, 무안접(務安接)이 80여 명, 순천접(順天接)이 50여 명이고, 영남에는 하동접(河東接)이 50여 명, 상주접이 20여 명, 선산접이 60여 명, 김산접(金山接)이 18명, 진주접(晉州接)이 60여 명, 인동접(仁同接)이 40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난파유고」 권3 부록: 초토사가 군공을 보고하는 별지. 11월 24일에 태완이 그들이 조금 나태해진 것을 보고 총을 잘 쏘는 포군(砲軍) 수백 명을 세 갈래의 기병(奇兵)으로 나누고 갑절이나 빨리 추격하게 하여 금안면(金安面) 남산(南山)마을 뒤편 산등성이에 이르러서 일제히 쏘아 죽이니 적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쏘아죽인 자가 350여 명이었고, 노획한 무기와 말은 그 수를 셀 수가 없었다. 이때부터 적의 기세가 크게 꺾여 다시는 광주·나주·함평·무안 땅에서 난리를 일으키지 못하였다. 태완이 다시 남쪽으로 영암(靈巖), 동보(東保), 남평(南平)을 구원하여 6차례 출전해서 크게 이겼다.
「난파유고」 권4 부록: 행장. 이해 11월에 민공이 초토사로 승진했기에 공이 명령을 받아 출정을 해서 남쪽으로 영암, 동보, 남평을 구원하였는데, 위성(威聲)이 이르는 곳마다 적들이 흩어졌다. 이어서 왕사가 내려와서 남은 무리를 체포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 제5: 1894년 12월 17일, 좌선봉진이 보고합니다.…(중략)…장흥·강진·영암·해남 등의 읍으로 각 부대를 동원하여 파병한 뒤로 비도의 정태를 아직 정탐하지 못하였으며 또 보고된 바도 없습니다. 이는 군무(軍務)에 있어서 매우 안타깝고 답답한 일입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5: 1894년 12월 19일, 영암군수가 보고합니다. 영암군의 군병이 출진하였다가 돌아오는 길에 동도의 괴수 주성빈(朱成彬)·강군오(姜君五)·김순범(金順凡)·정용달(鄭用達)·김순천·김권서(金權西)·박맹룡(朴孟龍) 등 7놈을 모두 붙잡아서 총살하였습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5: 1894년 12월 29일, 영암군수가 보고합니다. 방금 비밀 공문이 도착하였습니다. 비류의 거괴 최영기(崔永奇)·양아시(梁阿時) 2놈은 당일 압송하여 왔습니다. 최영기는 바로 유명한 동도라 본 군에서부터 기찰하여 체포하려한 지가 또한 이미 여러 달이 되었기 때문에 압송해 온 즉시 엄히 조사하여 실정을 얻었습니다. 양아시도 역시 비류의 거괴로 한바탕 엄히 조사한 후에 병영문으로 압송하고자 하였으나 온 경내의 백성이 분함을 씻고자 하는 자가 많았기 때문에 아울러 최영기와 함께 법대로 처치하였다는 사정으로 보고합니다.
「駐韓日本公使館記錄」 2권: 1894년 12월 3일(東學黨 勦滅方略에 관한 具申). 이상을 군사(軍事)에 경험이 없는 소관(小官)의 생각으로도 가장 적당한 방책이라고 생각하는 까닭은 첫째, 지세에 있어서 그럴 뿐 아니라 순천, 흥양, 영암, 나주 등 전라 서남해안은 모두 동학도가 만연하는 지방이므로 아군의 출정을 필요로 하는 곳입니다. 아울러 다른 방면의 동학도까지도 3면에서 구축하여 결국 전라 서남해안으로 밀어부쳐 한꺼번에 그들을 섬멸할 수 있을 것이고, 그렇게 한다면 적도가 강원, 함경 방향으로 도주하는 일도 적어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생각합니다.
논저
논문명(서명) 저자/필자 발행연도 쪽수
이상식 외 1996
사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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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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