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동학농민군에 참여했다가 관군에 체포된 최찬모가 잉어산에서 화형을 당하게 되자 아들 최윤삼이 불 속에 뛰어들어 아버지 대신 죽으려 했다. 이때 최윤삼은 한쪽 눈을 실명했고, 그의 효성에 감동한 관군이 최찬모를 살려줬다고 한다. 그 후 지역 유림들이 최윤삼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효자최공기실비(孝子崔公記實碑)〉와 비각을 세웠으나, 현재 비각은 없어지고 비만 남아 있다.
최찬모와 최윤삼이 살던 인평마을은 몽탄지역의 접주 김응문 생가와 그가 만들 무기제작소 터가 있는 차뫼마을 바로 건너편에 있다. 최찬모는 김응문 접주 휘하에서 동학농민혁명에 가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안지역 농민군에 대한 체포와 처형은 고막교 전투에서 배상옥이 이끄는 무안지역 농민군이 나주 수성군에게 패배하고 대접주 배상옥이 피신한 다음인 12월에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이규태(李圭泰)가 이끄는 좌선봉진군(左先鋒陣軍)이 무안읍에 도착한 것은 1894년 12월 11일이었지만, 이미 그 무렵 김응문(金應文) 형제를 비롯한 접주 및 지도자급 농민군이 70여 명이나 무안 수성군에게 체포되었고, 그 가운데서 30여 명은 무안 수성군이 이미 처형하였다. 무안지역 농민군은 선봉진이 무안에 들어온 다음에도 다수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일부는 구금되었다. 구금되었던 나머지 농민군과 이후 체포된 많은 농민군도 처형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최윤삼의 아버지 최찬모도 이 무렵 체포되어 처형될 위기에 처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