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10월 15일경 손화중이 이끄는 광주 동학농민군과 오권선의 나주 동학농민군은 나주성 공략을 위해 나주 방향으로 진군함. 그러나 10월 21일부터 광주 침산과 선암산 일대에서 나주 수성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여 광주로 후퇴함
1894년 11월초, 광주의 손화중과 최경선은 나주 재공격을 계획함. 이때는 나주의 오권선과 무안 동학농민군을 이끌던 배상옥이 합류하기로 함. 이에 대해 나주 수성군을 이끌던 민종렬은 11월 11일 용진산으로 수성군을 보내 농민군을 공격하였고, 12일 용진산의 동학농민군은 나주 수성군에 패배하여 후퇴함
무안의 배상옥은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손화중의 동학농민군에 합류하기 위해 이동함. 1894년 11월 17일 무렵 나주 외곽의 30여 리 지점에 있는 고막포와 고막원 주변에 집결함. 여기에는 무안 동학농민군뿐만 아니라 함평과 진도 일대의 동학농민군도 가담함
동학농민군의 동정을 살피던 나주 수성군 소속의 염탐군은 이를 민종렬에게 보고하였고 이에 민종렬은 전주에 주둔하던 마쓰모토(松本保一) 휘하의 일본군과 좌선봉장 이규태에게 지원을 요청함. 이와 함께 나주 수성군에게 고막포 일대로 출정명령을 내림
나주 수성군은 11월 18일 오전에 고막원 동쪽 청림산(靑林山)과 호장산(虎壯山), 진등참 일대에 포진했던 동학농민군을 공격함. 이때 동학농민군은 수성군의 대포의 위력에 밀려 후퇴하기 시작함. 이때 동학농민군은 고막교를 건너 후퇴하였고, 수성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고막교 일부를 허물기도 함
이후 나주 수성군은 나주로 후퇴했다가 11월 21일 포군 300여 명을 이끌고 고막리 일대의 동학농민군에 재차 공격을 실시함. 동학농민군은 고막교 전투에 패배하여 후퇴하였고 다시 함평과 무안일대에 머물면서 활동을 전개함
고증내용
「금성정의록」 갑편: 11월 17일. 서면의 정탐이 급히 고하기를 “적의 무리가 무안(務安)의 경계에 있는 고막포(古幕浦) 등지에 모여 있는데 그 수가 5, 6만이다”라고 하였다. 서쪽 5면을 겁략하여 장등참(長嶝站)까지 침박하기에 이르렀다. 소리 높여 말하기를 “나주로 들어가 성호(城濠)를 공격하여 뺏을 것이다”라고 하니 형세가 매우 예측하기 어려웠다.…(중략)…관군이 용감하게 활약하여 일당백이 아닌 사람이 없으니 10여 리나 추격하여 살륙하였다. 급박하게 고막교(古幕橋)에 도착하니 사람은 많고 다리는 좁아 물에 떨어지는 자가 그 수를 셀 수가 없었다.…(중략)…고막(古幕)의 남은 무리가 함평과 무안 등 여러 읍의 비류(匪類)를 다시 모은다는 급보(急報)가 답지하여, “서창(西倉)의 세곡(稅穀)을 모두 징발했다”고 하였다.…(중략)…적이 기세등등한 관군을 보고는 감히 저항하지 못하고 고막산(古幕山)을 향해 달아났다. 20여 리를 추격하니 적도(賊徒)는 꺾이어 모두 흩어졌다.
「금성정의록」 을편: 초토사보군공별지(招討使報軍功別紙). 11월 16일에 무안(務安) 거괴(巨魁)가 주(州) 서쪽 30리 고막포(古幕浦)에 모여 주둔하고 있다는 경보가 연달아 급하게 도착하였다. 정태완은 또 군장(軍將)을 영솔하고 민병을 소집하여 적과 10리 쯤 떨어진 초동시(草洞市)에 나가 진을 치고 적세를 엿보니 그 수가 숲처럼 많아 갑자기 가볍게 공격하기 어렵고 중과부적이라 힘으로 취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먼저 뛰어난 포군 1백여 명을 장등(長嶝)의 요로에 매복해 두고 민병을 지휘하여 요응지세(遙應之勢, 멀리서 응하는 태세)로 삼고 합병(合兵) 3진(陣) 또한 기각지세(掎角之勢)로 삼아 기를 눕히고 북을 쉬게 하고 잠시 겁약한 형세를 보였다.
「난파유고」 권3 부록: 초토사가 군공을 보고하는 별지. 11월 16일에 무안(務安)의 거괴(巨魁)가 나주의 서쪽으로 30리 떨어져 있는 고막포(古幕浦)에 집결하니 연달아 급보가 왔다. 태완이 다시 군장을 이끌고 의병을 모집하여 적과의 거리가 10리쯤 되는 초동시(草洞市)에 가서 진을 쳤다. 적의 형세를 탐문해보니 적의 숫자가 숲처럼 많아서 단번에 격퇴하기가 어려웠다. 적의 수효가 많아 상대하지 못하고 힘으로 빼앗을 수 없었기 때문에 먼저 포를 잘 쏘는 포군(砲軍) 100여 명을 장등(長嶝, 산등성이)의 요충지에 매복시키고 의병을 지휘하여 멀리서 호응하는 형세를 만들었고, 병사를 3개 진영으로 나누어 또한 기각지세(掎角之勢, 앞뒤에서 적을 몰아치는 태세)를 이루었으며 깃발을 내리고 북을 멈추어서 잠시 겁을 먹어 위축된 형세를 보였다.
「난파유고」 권3 부록: 갑오토평일기. 11월 17일에 도통장 정석진과 부통장 김재환 및 중군장 김성진이 포군 300명을 인솔하여 20리 거리의 자지현(紫芝峴)에 나갔는데, 적이 무안(務安) 고막포(古幕浦)에 있는데, 그 무리가 5만에서 6만명이라고 하였으나 날이 이미 저물었다. 그래서 부통장에게 말하기를, “적은 많고 아군은 적으며 서로의 거리가 고개 하나 사이여서 지키는 데는 여유가 있으나 진격하는 것은 참으로 어렵다.…(중략)…관군은 기세가 올라 한 명이 100명을 감당하지 않은 이가 없었고 시체가 들판에 널렸다. 10여 리를 추격하여 고막교(古幕橋)에 이르렀는데, 사람은 많고 다리는 좁은데다가 조수는 불어나서 물에 떨어져 죽은 자가 그 숫자를 셀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적이 마침내 궁지에 몰림을 헤아려서 죽음으로써 저항하였다.
「난파유고」 권4 부록: 행장(行狀). 11월 16일 고막의 전투 때에는 무안의 비도가 모인 것이 숲처럼 많고, 기세가 매우 대단하였습니다. 공이 다시 장령들을 통솔하고 민병과 합세하여 적과 10여 리 되는 곳에 진을 쳤는데, 저들은 많고 아군은 적었으나, 오직 계책만으로 승리를 하였습니다. 포군을 지휘하여 양쪽에 매복을 시키고 우리의 약함을 보였더니 저들이 정말로 가볍게 여겨 수만의 병사가 양쪽 길로 나누어 불을 지르고 포를 쏘며 바람을 몰듯이 공격해 왔습니다.
「난파유고」 권4 부록: 정장군전(鄭將軍傳). 고막(古幕)의 전투에서는 비도(匪徒)가 숲처럼 많고 그 기세가 불처럼 대단하며 저들은 많고 우리는 적어서 모두 의심하고 두려워했으나 장군이 계책을 내어 승리를 얻었습니다. 먼저 약함을 보였더니 적이 정말로 쉽게 여겨 전진해오자 장군이 용기를 내어 먼저 오르고 매복한 병사가 갑자기 나오니 적들이 모두 부딪히고 물에 뛰어들어 죽는 자가 뒤를 이었습니다.
「송사집」: 나주평적비.
「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 14일 나주-삼향, 시랑, 거평, 수다, 곡강, 두동 각 면의 집강에게 전달한 훈령. 전번에 각처 비류(匪類)가 고막(古幕) 등지에 모여서 각 마을의 우마(牛馬), 전곡(錢穀), 집물(什物)을 마음대로 약탈하였으니, 이는 전에 없던 변괴다. 그러나 하늘이 벌을 내려서 오늘 거개가 사형에 처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