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기포한 동학농민군의 주력부대는 고창, 흥덕, 고부, 금구, 태인, 정읍 등을 거쳐 4월 12일에 영광에 도착함. 4월 12일 세곡을 한양으로 보내기 위해 법성포에 나가있던 군수 민영수는 동학농민군이 영광에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배를 타고 칠산(七山) 앞바다로 도주함
법성에 도착한 동학농민군은 군기고에 불을 질러 무기를 탈취하고, 돈과 곡식, 말 등을 빼앗음. 동학농민군 중 일부는 4월 14일 법성 구수포로 가서 한양호를 공격하여 조선인 전운국과 김용덕, 일본인 다나카 외 3명, 총 6명을 체포함
1894년 기준 법성포에는 조창이 있었고 전라도의 세곡을 경창으로 운반하기 위해 선박의 출입이 잦았던 곳임. 동학농민군이 법성을 공격한 것은 군량미 확보를 위한 것으로 보임. 이 밖에도 일본상인들이 법성포에 들어와 일본에서 가져온 잡화류를 비싸게 팔고 있었기 때문에 동학농민군의 공격대상이 되었을 것으로 보임
당시 동학농민군은 법성진성과 법성포 조창 등지를 공격하여 주둔하였을 것으로 판단됨
고증내용
「수록」: 1894년 3월 27일 계초, 이달 22일 도착한 무장현감 조명호(趙命鎬)의 보고 내용에, “이달 16일 무장현 동음치면(冬音峙面) 당산(堂山) 땅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난류배(亂類輩) 수천 명이 무리를 모아 가까이 다가와 머무르고 있으며, 그들의 종적이 수상하다고 전하는 이야기들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영리한 서리와 장교를 보내어 몰래 조사하여 알아보니, 이들은 본 읍의 백성들이 아니었고, 거의 모두가 다른 읍의 백성들이었습니다. 해당 촌 백성들의 집에 모였는데 동학도(東學徒)라고 칭하였습니다. 처음에는 100여 명을 넘지 못하였으나, 16일부터 18일까지 며칠 사이에 밤낮으로 사방에서 몰려와 천여 명이나 되었는데, 모두가 해당 촌의 앞에 있는 평야에 모여 있었습니다. 거주하는 곳이 영광(靈光)과 법성(法聖) 양 읍의 경계에 서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저들 무리 중 수백 명이 법성 진량면(陳良面) 용현리(龍峴里)의 대나무 밭이 있는 곳에 가서 대나무를 베어 창을 만들었고, 혹은 각처에 있는 촌민의 집에 사람을 보내어 남아 있는 약간의 조총과 쇠뇌와 낫과 삽 등의 물건을 일일이 수색하여 빼앗아 갔습니다.
「동비토록」: 1894년 4월 16일 해시 완백, 정부에서 지금 전운사(轉運使)가 초토사에게 보낸 문서를 보면, “한양선(漢陽船)이 곡식을 싣고서, 13일에 영광 구유포(九峀浦)를 떠났는데, 14일 유시(酉時)에 동도 10,000명이 법성포(法聖浦) 앞뒤의 산과 구유포 앞뒤의 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각기 창과 칼을 지니고 포를 쏘며 한양선에 난입하여 배판을 부수었습니다. 사공과 격군, 그리고 일본인을 갑자기 구타했으며, 인항(仁港) 위원(委員)인 김덕용(金德容)와 그곳의 종인(從人) 강인철(康人喆)을 결박해서 잡아갔습니다.
「동비토록」: 1894년 4월 21일 가도사의 전보, 정부가 영광 군수의 치보에 의하면, “동도 10,000여 명이 각각 총과 창을 가지고 19일에 성에 들어와서 군기고의 문을 부수고 무기 등의 물건을 무수히 가져갔으며 공해(公廨)의 문서와 장부를 찾아내어 모두 불태웠고 요호(饒戶)에게서 전곡(錢穀)과 말을 모두 빼앗았습니다. 15일에는 법성포에 짐을 실러 온 전운(轉運) 위원(委員) 2명이 저들에게 잡혀서 무수히 맞았습니다. 16일 아침이 지난 뒤에 수성통장(守城統長) 정만기(鄭萬基)도 그들에게 잡혔는데, 결박하여 데려가다가 중도에서 총을 쏘아 죽이고 바로 함평으로 갔습니다”라고 하였다.
「양호전기」: 1894년 4월 22일 무진, 대내에 전보하기를, “21일에 영광에 군사가 도착하였는데 심영의 병사들이 19일에 웅연(熊淵)에 도착하여 정박하였다는 보고를 들었습니다. 함평과의 거리가 조금 멀기 때문에 법성포에서 육지에 내리는 것으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지금 함평의 보고를 보니 저들은 경군이 추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제 미시(未時, 오후 1∼3시) 경에 또 흩어져 장성·나주 등지로 향하였다고 합니다. 방금 2개 정예부대를 선발하여 파견하였는데 저들이 갑자기 모였다가 흩어지고 도로가 험하고 좁아 대포를 운반하기 어렵고 여러 군사들도 추격하기 어렵습니다. 비록 각 읍에 거듭 명하여 특별히 방어하게 하였으나 토병들은 제대로 방어하지는 못합니다. 저들이 흩어져 영남으로 도주할 염려가 있는 듯하니 걱정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권: 1894년 5월 22일(東學黨에 관한 속보), 지금 전운사(轉運使)가 초토사(招討使)에게 보낸 공문을 보건대, 漢陽船註이 세곡을 싣기 위해 13일 영광 구수포(九峀浦)로 보내졌는데, 14일 유시(酉時)에 동학도 수만 명이 법성포의 앞 뒷산과 구수포의 앞 뒷산에 진을 치고 있다가, 몇 시간 동안 창과 칼을 들고 포를 쏘면서 한양선(漢陽船)으로 들어와 船板을 부수고 沙工註과 日人들은 물론 인천항의 위원 김덕용과 그의 추종자 및 고용인들을 만나기만 하면 구타를 하고 그리고 우리를 힐책한 후 묶어서 잡아갔으며 이내 구속하였으므로, 한양선은 세곡을 싣지 못하고 당일로 다시 군산항에 돌아왔습니다. 이 사건은 매우 해괴하고 놀라워 먼저 전보로 통지를 하옵니다.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권: 1894년 5월 25일(東學黨彙報), 영광 군수가 법성포 창고의 곡식과 군기를 배에 싣고 바다에 떠 있었으므로, 동학도들은 정당(政堂)과 공해(公廨)를 불태우고 그곳을 점령하였고, 창고의 곡식과 군기를 빼앗겼다는 말은 와전된 것이다. 신관(新官)은 부임하지 못하고 전주로 가서 完營註에 머무르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