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3월 20일 무장에서 1차 기포 후 동학농민군 주력부대는 고창, 흥덕, 고부, 금구, 태인, 정읍 등을 거쳐 4월 12일 오전 10시경에 영광에 진입함. 이때 농민군의 수는 1만여 명에 이름.
동학농민군들은 영광관아를 점령하고 4일 간 유진하였는데, 낮에는 진법을 훈련하고 밤에는 경전을 읽은 것으로 파악됨. 또한 관아를 점령한 동학농민군들은 짚을 모아 흙으로 성첩(城堞)을 보수하였으며, 운반해온 곡식을 비축하기도 함
영광에 주둔하던 동학농민군의 수는 날로 증가하여 무장에서 1차 기포 당시의 3배인 약 1만 2,000명~1만 4,000명이 집결하게 됨
고증내용
「남유수록」, 1894년 4월 20일, 13일 나온 영광의 보고에 의하면, “동적(東賊) 10,000여 명이 성안에 난입하여 사방으로 총을 쏘아 거주하는 백성들이 흩어졌으나 그들을 궤멸시킬 방책이 없어 송구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겠다”고 한 일.
「양호전기」: 1894년 4월 17일(계해), “저들 무리의 정적을 정탐하니 한편은 영광에 머물러 있고 한편은 함평(咸平)으로 향한다고 하니 경군이 길을 재촉하여 저들이 머문 곳으로 쫓아가 장차 접전을 할 계획입니다.”…(중략)…오늘 술시 경에 염탐꾼이 들어왔기에, 자세히 저들의 형상을 물으니 13, 14 양일 밤에 혹 6~70명씩 혹 4~50명씩 총과 창, 칼을 가지고 흥덕을 지나 부안으로 향하고 영광에 주둔한 자가 날마다 더욱 늘어나 짚을 모아 사토(沙土)를 섞어서 성첩을 쌓고 남문만을 열어 군량을 운반하여 쌓아두니 그 기세가 점점 성대하다고 합니다.
「동비토록」: 1894년 4월 18일(완백), 정부가 영광 공형의 문장을 보니, “영광 수령이 세미(稅米)일로 9일에 전운소(轉運所)로 갔는데, 저들이 관아가 빈 것을 이용하여 12일에 성안으로 난입하였습니다. 본읍의 수령은 아직 관아로 돌아오지 않았고, 저들은 성안에 집결하여 다른 조처를 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다.
「백석서독」 14권: 1894년 5월 4일, 근래에 동도(東徒)가 무장(茂長)과 영광(靈光)의 경계사이에 집결하였는데, 하나도 토벌하지 못했다고 하니 분하고 한탄스럽다. 이 곳 근처의 4~5개 읍의 사대부집 중에 곤욕을 당하지 않은 곳이 없고, 또한 구타하는 지경까지 있었다.
「난파유고」 권3 부록: 갑오토평일기, 초토사(招討使) 홍재희가 영광에서 약간의 군대를 보내어 적을 살피게 했는데, 적과 마주쳐서 대관(隊官) 이도승(李道承, 이학승(李學承)의 오기)이 죽고 관군이 패배하였다. 이날이 4월 22일이었다.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권: 1894년 5월 21일(東學黨彙報), 동학도 1만여 명이 靈光郡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5里마다 복병을 두어 30里의 거리에 2,500명씩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기세는 이와 같이 확대되어 하루에 늘어난 수가 몇천 명이 된지도 알 수 없으며 사방에서 그 추종자들이 운집하여 각처를 왕래하면서 서신을 전달하고 있으니 민망스럽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