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조선정부의 요청을 받은 청에서는 1894년 5월 초에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였다. 이에 따라 청과 일본 간에는 전운이 감돌았으며, 한반도는 청일전쟁의 전장으로 변할 위기에 처하자 청-일군이 조선이 주둔하는 명분을 없애기 위해 전봉준은 5월 8일 전주성에서 철병하였다. 동학농민군은 각지로 돌아가 폐정개혁활동을 하며 청-일군의 동향을 예의주시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철병은커녕 1894년 6월 23일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하여 조선군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한편 25일에는 청일전쟁을 도발하였다. 이에 따라 전봉준은 전략을 바꾸어 ‘반봉건 투쟁’을 어느 정도 유보하고 ‘반외세 투쟁’을 도모하게 되며, 2차 기포에서는 보수유생층까지도 중요한 연합대상으로 삼게 된다.
1894년 여름부터는 일본군의 침략행위가 명백해진 다음이었기 때문에 1차 기포에 비해 유생층들과의 연합 가능성은 그만큼 넓혀져 있었다. 실제로 일부 유생들 사이에서는 ‘반왜창의(反倭倡義)’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공주의 유생 서상철(徐相轍)이 1894년 7월 2일 안동향교의 명륜당에 모이라는 반왜창의문을 돌린 사실이다. 서상철은 ‘위로는 진신(縉紳)으로부터 아래로는 필부에 이르기까지 임진왜란 때 참화를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음’을 상기하면서 일본이 경복궁을 강점하여 국왕과 관료들을 협박하고 군대를 쫓아낸 일은 임진왜란 때보다 더 심하다고 하였다. 또 일본은 우리나라의 백세의 원수이며, 우리나라 일은 우리가 자주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유의군자(有義君子)들은 모두 무기를 들고 모이라고 촉구하였다. 그러나 서상철의 통문에 의해 유생들이 실제로 모였다는 정황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