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일부 동학농민군은 논산을 출발하여 노성과 공주 경천점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여기서 동학농민군은 3로로 나누어 공주를 향해 농민군을 진출시켰다. 우선 주력부대인 전봉준부대의 1대는 이인역으로 진출하였고, 다른 1대는 무너미[판치(板峙)]를 넘어 공주 남쪽 10여리 지점의 효포로 진출하였으며, 손병희부대(통칭 옥천·영동包)는 공주 동쪽 30리 지점의 대교에 진출하게 되었다. 2만명의 동학농민군이 3로로 나누어 동시에 진출하면서 공주를 3면에서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때 공주를 방어하던 일본군이 미처 도착하지 않아 일본군 1개 중대(200명)와 조선정부의 경군 약 800명 및 소수의 영병과 민보군이 방어 군세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전봉준이 세성산전투의 참패 소식을 듣고 관군과 일본군이 천안에서 내려올 것을 대비하여 공주 공격을 서둘렀던 것으로 확인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