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경상도 북부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일본군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5월 초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의 움직임이 어느 지역보다 직접적으로 관찰되었고, 그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은 청나라와의 일전에 대비하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전선가설을 서둘렀고, 7월 중순에는 부산·구포·삼랑진·물금포·밀양·청도·대구·다부역·낙동·해평·태봉·문경 등에 설치되었다. 각 병참부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였으며, 농민군은 이에 반감을 품고 이들을 물리치려 하였고 일본군은 보급과 통신의 요충지인 병참소가 언제 농민군의 공격을 받을지 몰랐기 때문에 오히려 주변의 농민군 세력이 강성해지면 곧장 기습적으로 공격하여 그 세력을 위축시키고자 하였다.
선산 가까이에는 해평과 낙동 두 곳에 일본군 병참소가 설치되었다. 선산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는 것은 1894년 여름부터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이 선산성을 점령한 것은 9월 20일 이후 무렵이었고, 여기에는 김천지역 농민군도 합세하였다. 선산관아가 농민군에게 점령당하자 선산의 향리들이 몰래 낙동의 일본병참부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일본군은 10월 1일 선산성을 점령해 있던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농민군은 김천의 접주 김정문 휘하의 농민군 15명을 포함하여 다수의 사상자를 내고 선산성에서 퇴각하였다. 이때 선산성을 공격한 일본군은 낙동병참두의 병력과 부산수비대에서 파견된 후지타(藤田)부대였다. 후지타는 하사 4명, 병졸 60명, 통역 2명, 인부 10명을 이끌고 8월 29일 낙동에 도착한 후 낙동병참사령관의 지휘를 받아 일대의 농민군 진압에 투입되었다. 그의 부대는 9월 29일 상주성을 공격하여 농민군을 몰아낸 이틀 후인 10월 1일 다시 선산부를 공격한 것이다. 현재 자료상 확인되는 선산농민군 지도자로는 신두문(申斗文)이 있다. “거괴(巨魁)”로 표현되던 그는 11월 10일경 선산부에 체포되었으며, 선산관아에 수감되어 있다가 12월 14일 상주 소모영의 소모사 정의묵에 의해 총살되었다.
〈갑오농민군 선산읍성 전적비〉 및 〈갑오전쟁선산창의비〉는 이러한 선산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의 기념하여 세워놓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