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강선보는 포도대장으로서 경상도 상주에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가 체포되어 1894년 11월 7일 처형되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소모영에서 남긴 「소모사실(召募事實)」에는 강선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화북면(化北面) 임곡에 거주하는 강선보(姜善甫)는 평소부터 행패를 부리고 나쁜 짓을 자행하여 동네 사람들이 이를 갈고 있었는데, 동도(東徒)에 들어간 뒤로는 이를 기회로 여기고 스스로 포도대장(布道大將)이라고 칭하며 무리들을 불러 모으고 기치를 늘어세우니, 그 행동이 흉악하고 참혹하며 그 광경이 사람들을 두렵게 하며 가는 곳마다 난동을 부리는 것이 끝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이 강선보는 소문이 자자한 “거괴(渠魁)”였기 때문에 상주 소모영이 설치된 뒤 소모사는 가장 먼저 달려가 그를 체포하였다. 그가 체포된 정확한 날짜나 구체적 경위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거접(巨接)으로 표현된 외남면(外南面) 하병리(下丙里)의 강홍이(姜弘伊), 공성면(功城面) 소리(素里)의 김경준(金景俊)과 같은 무렵 체포되어 소모영에 구금되어 있다가 11월 7일 처형되었다. 처형되기에 앞서 상주 관아의 문루인 태평루 앞에서 소모사 정의묵(鄭宜默), 상주목사(尙州牧使) 이만윤(李晩胤), 상주진 영장(尙州鎭 營將) 유인형(柳寅衡)의 문초를 받았다. 문초 후 강홍이와 김경준은 모두 남사정으로 옮겨져 총살되었지만, 강선보는 주민들에게 경계하려는 목적에서 그들과 달리 문초를 받은 직후인 정오 무렵 상주 주민들이 모여 있던 태평루 앞에서 효수되었다. 임곡에서는 11월 23일에도 농민군이 상주를 점령했을 때 무기를 빼앗아 간 우두머리였던 농민군 이용복(李用卜)이 김석중에게 체포되어 11월 24일에 총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