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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정보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상주 동학농민군 처형지(상주관아)
  • 지 역
  • 경북
  • 주 소
  • 경상북도 상주시 남성동 1-4 , 1-129번지 상주시 도시재생지원센터
  • 문화재
  • 분 류
  • 점령지
  • 정 의
  • 1894년 9월 20일 무렵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점령하였던 곳이고, 농민군이 패퇴한 다음에는 상주 소모영이 설치되어 농민군 진압을 진두지휘하였던 곳이며 농민군 지도자 강선보 등 많은 농민군들이 처형된 곳.
관련 역사적 사실
상주 지역 농민군은 이미 1894년 5월 무렵부터 활발해졌다. 일본영사관에서는 5월 10일 경상도에서는 충청·전라도와 지방, 그 가운데서도 선산·상주·유곡이 ‘동학농민군의 소굴’인 것으로 파악하였다. 상주 31개면 가운데 농민군 세력이 특히 강성했던 지역은 중서지역(화북, 화동, 화서, 모동 모서)이었다. 이들 지역에서는 평천민 뿐만 아니라 화서의 강선보나 모서의 김현영과 같이 양반의 후예들 가운데서도 농민군 지도자가 나와 농민들과 함께 양반지주와 토호들을 공격하며 기왕의 향촌지배질서에 도전하고 있었다.
상주 농민군의 활동 역시 경상도 북부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5월 초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의 움직임이 어느 지역보다 직접적으로 관찰되었고, 그에 대한 민중 반감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은 청나라와의 일전에 대비하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전선 가설을 서둘렀고, 7월 중순에는 부산·구포·삼랑진·물금포·밀양·청도·대구·다부역·낙동·해평·태봉·문경 등에 설치되었다. 각 병참부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였으며, 농민군은 이에 반감을 품고 이들을 물리치려 하였다. 상주에서 농민군과 일본군 간에 직접적인 충돌이 처음으로 일어난 것은 8월 25일이었다. 일본군 태봉병참부에서는 이 지역 농민군들이 태봉병참부를 공격하려는 기미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부관인 대위 다케우치(竹內)가 병정 2명을 보내 정찰하도록 하였다. 이들은 농민군 집결지를 정찰하다가 용궁(혹은 산양) 부근에서 농민군에게 발각되어 살해되고 다른 병사 1명도 손가락을 잘리고 총을 빼앗겼다.
이에 대해 부산의 일본 중로병참감 대좌 요시가와(吉川)는 충주와 문경병참부에 태봉병참부를 지원하도록 지시하였다. 8월 29일 공병소위 고토(後藤馬次郞)가 인솔하는 충주병참부의 일본군 25명과 일본인부 12명은 문경으로 가던 도중 석문(石門)에서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이 전투는 전국을 통틀어 농민군이 일본군과 벌인 첫 전투였다. 당시 석문에 집결해 있던 농민군은 600여명이었으나, 불의의 습격을 받고 2명이 전사하고 다수가 부상당한 채 흩어졌다. 병영으로 쓰던 11채의 가옥은 불태워졌으며, 화승총 103정, 도검 4자루, 창 3자루, 말 2마리, 동전 9관(貫)을 빼앗겼다.
상주지역 농민군이 관아를 점령한 것은 9월 22일경이었다. 당시 상주에는 100여명의 관포군이 있었으나, 농민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갑오척사록』에 따르면 예천에서 민보군의 공격을 받고 흩어졌던 농민군들이 다시 상주에 모여 있었으며, 대략 1만여 명에 이르는 이들은 상주관아 점거하고 객관에 모여 있었는데, 예천과 함창에서 빠져나간 농민군들도 합세해 있었다. 이들은 선산·김천의 농민군과 호응하여 예천을 도륙한 뒤에 안동과 의성을 칠 것이라고 호언하고 있었다. 그러나 상주성의 농민군들은 9월 29일 오전 줄사다리를 이용하여 성으로 넘어 들어온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3시간여의 접전을 벌였으나, 50명의 전사자와 2명의 포로를 남기고 상주에서 빠져 나갔다. 이때 일본군은 부산수비대에서 파견된 후지타(藤田) 부대로 이들은 하사 4명, 병졸 60명, 통역 2명, 인부 10명의 규모로 8월 29일 낙동에 도착한 후 낙동병참사령관으로부터 일대의 농민군을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고 상주를 공격한 것이다. 농민군이 버리고 간 무기는 모두 낙동병참소로 가져갔다.
이후 상주에서도 예천과 마찬가지로 향리층이 주도하여 보수집강소를 설치하고 500명의 민보군을 모아 농민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이어 9월 29일 조정으로부터 경상 북부지역 소모사로 임명된 상주의 전승지(前承旨) 정의묵(鄭宜默)이 관아로 들어가 10월 20일 장관청(將官廳)이던 벽유당(碧油堂)에 소모영(召募營)을 설치하였다. 상주 소모영은 안동(安東), 상주(尙州), 청송(靑松), 순흥(順興), 문경(聞慶), 예천(醴泉), 영천(榮川), 풍기(豊基), 의성(義城), 용궁(龍宮), 봉화(奉化), 진보(眞寶), 함창(咸昌), 예안(禮安), 영양(英陽) 등 경상도 북부 15개 고을을 관할하였다. 소모사 정의묵은 전응교(前應敎) 장승원(張承遠)과 유학(幼學) 강석희(姜奭熙), 박해조(朴海祚), 조희우(曺喜宇) 등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유학 김석중(金奭中)을 유격장(游擊將)으로 차출하였는데, 그 영향력은 충청도 일대에까지 미쳤다. 특히 김석중(金奭中)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김석중은 민보군 가운데서 선발한 200명의 별포군(別砲軍)을 이끌고 영동, 청산, 보은 등 충청도 지역 농민군 진압에도 앞장섰으며, 12월 17-18일에 걸쳐 치러진 보은 북실 전투에도 참여하였다. 상주 소모영이 1895년 1월 24일 해체될 때까지 상주는 농민군 진압의 거점이 되었으며, 많은 농민군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형벌을 받거나 처형되었다.
소모영 설치 이전에 보수집강소에서 체포한 농민군 9명을 장날인 10월 22일 태평루(太平樓) 앞에 설치된 형장에서 엄형한 것을 시작으로 11월 7일에는 체포된 후 이곳으로 끌려왔던 임곡(壬谷)의 농민군 지도자 강선보(姜善甫)가 태평루 앞에서 효수되었다. 11월 22일에 체포된 농민군 지도자 남계일(南戒一), 손덕여(孫德汝), 최선장(崔善長), 이의성(李義城), 장판성(張判成), 피색장(皮色匠) 억손(億孫) 등 6명이 24일 역시 태평루에서 총살되었다. 12월 14일에는 전날 체포된 남촌(南村)의 “거괴(巨魁)” 최인숙(崔仁叔), 윤경오(尹景五), 김순녀(金順汝), 전명숙(全明叔) 등 4명이 태평루 앞에서 효수되었다.
고증내용
태평루 터에 표지석이 있고, 상산관과 태평루 모두 〈상주임란북천전적지〉기념공원에 이전되어 보존되고 있으나, 동학농민혁명 관련 안내문이나 표지석은 없다. 원래 상주관아 터에는 현재 상주시 도시재생지원센터가 들어서 있다.「소모사실」·「소모일기」·「갑오척사록」 등에 관련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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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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