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9월 29일 조정으로부터 경상 북부지역 소모사로 임명된 상주의 전승지(前承旨) 정의묵(鄭宜默)이 관아로 들어가 10월 20일 벽유당(碧油堂)에 소모영(召募營)을 설치하면서 상주는 농민군 진압의 거점이 되었으며, 그 영향력은 경북 북부와 충청도 일대에까지 미쳤다. 특히 소모영 유격대장으로 임명된 유학 김석중(金奭中)의 활약이 두드러졌으며, 많은 농민군들이 이곳으로 끌려와 형벌을 받거나 처형되었다. 가장 많은 농민군이 처형된 곳이 관아의 문루인 태평루 앞과 남사정이었다. 남사정은 관군들이 활쏘기와 말타기를 연마하는 훈련장이었으며, 상주에 소모영이 설치된 다음에는 소모영 병사들도 이곳에서 훈련하였다.
11월 7일에는 임곡(壬谷)의 농민군지도자 강선보(姜善甫)와 같은 무렵 체포되었던 외남면(外南面) 하병리(下丙里)에 살던 접주 강홍이(姜弘伊)와 공성면(功城面) 소리(素里)의 접주 김경준(金景俊) 등 2명이 남사정(南射亭) 아래에서 총살되었다. 강홍이는 “무리를 이끌고 행패를 부리며 남의 재산을 빼앗고 남의 무덤을 파헤치며 심지어 양반가의 안채에 몽둥이를 들고 돌입하여 마구 욕설을 퍼붓고 매질을 하였으며”, 김경준은 “양반 강씨의 노비 신분으로 무리를 모으고 처를 데리고 그 상전의 안채로 돌입하여 상전을 붙잡아 욕을 보이고 사통(私通)을 보내 흉도들을 불러모았다”고 하였다.
12월 12일 오전에는 소모사가 직접 군사와 백성들 1,000여 명을 소집하여 남사정에 나가서 11월 29일 이후 체포되었던 이득이(李得伊), 박기봉(朴起奉), 권화일(權和一), 김순오(金順五), 이도생(李道生), 배춘서(裵春瑞), 박창현(朴昌鉉) 등 7명 가운데 이득이와 박기봉은 효수, 권화일 등 5명은 총살하였다. 12월 22일에는 상주 경내에서 체포되어 소모영으로 끌려왔던 상주의 박효식(朴孝植), 충청도 영동의 김흥업(金興業) 김경학(金慶學), 청산의 안소두겁(安小斗劫) 김유성(金有成) 박기준(朴基俊) 지상록(池相彔), 황간의 김사문(金士文) 이상신(李尙信) 신윤석(申允石) 등 10명 가운데 박효식은 효수되고 김흥업 등 9명은 총살되었다. 12월 24일에는 상주 내서면의 전오복(全五福), 갈곡 이규삼(李圭三), 화령장터의 이태평(李太平) 등 3명이 역시 남사정에서 총살되었다. 전오복는 정탐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고, 이규삼은 30년 동안 동학의 “접괴(接魁)”로 활동했으며, 이태평은 동학에 입도한 후 노비의 신분으로 주인을 구타한 일이 있으며, 정탐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