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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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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동학농민군 처형지(화령장터)
  • 지 역
  • 경북
  • 주 소
  • 경상북도 상주시 화서면 신봉리 153-1 , 153-2 일대.
  • 문화재
  • 분 류
  • 기타
  • 정 의
  • 상주 소모영의 유격장 김석중에 의해 동학농민군 안치서, 김자선, 서치대, 정항여 등이 포살된 곳
관련 역사적 사실
상주 지역 농민군은 이미 1894년 5월 무렵부터 활발해졌다. 8월 25일에는 용궁 부근에서 일본군 정찰대와 조우하여 그 중 대위 다케우치(竹內)를 포살하고 다른 병사 1명을 부상시키기도 했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8월 말 상주 일대의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부산수비대에서 2개 소대를 이곳으로 증파하였으며, 9월 22일경 상주성을 점령하였던 농민군도 9월 29일 이들에 의해 해산되었다. 이후 각지로 흩어진 상주 농민군들은 곳곳에서 활동하며 상주성을 다시 점령하기 위해 세력을 결집시켰으나, 11월 13일 상주 소모사 정의묵에게 자청하여 유격장이 된 김석중(金奭中)이 이끄는 민보군에 의해 하나씩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11월 13일 유격장이 된 김석중은 바로 그날 밤 민보군을 이끌고 농민군 지도자 체포에 나섰다. 모동 화동 화서 화령 등 상주 지역 뿐만 아니라 충청도의 보은 청산 영동 등지로 진격하여 곳곳에서 농민군 지도자를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11월 13일 밤 12시쯤 김석중은 참모인 사인(士人) 성호원(成灝源)·윤흥렬(尹興烈)·성걸(成杰), 동생인 김직중(金稷中) 및 초장 박유현(朴裕顯)·김상오(金常五)·유우석(劉禹錫) 등과 함께 별포 20명을 거느리고 소모영을 출발하여 14일 새벽에 모동에 도착하였다. 이어 용호리와 사제의 농민군 지도자 이화춘 구팔선 김군중 유학언 등 4명을 체포하여 중모시(中牟市)에서 포살한 김석중은 11월 15일에는 외남(外南) 왕곡(旺谷)으로 가서 조왈경(趙曰京)을 체포하여 역시 다음날 처형한 데 이어 18일에는 화서면 대곡(垈谷, 터골)에서 청주대접주 김자선(金子先)·접사 서치대(徐致大)·접주 정항여(鄭項汝)를 체포하였다. 김석중의 보고에 따르면 김자선은 본래 보은 장내리에 거주하는 대접주로 10월 17일 그 무리 4,500 명을 거느리고 청주를 함락하려고 세교(細橋) 장터에 이르렀으나 일본 병력에 패배한 후 상주에 잠입하여 다음 기포를 도모하고 있었다. 정수여·서치대는 사대부를 결박하여 구타하고 재물과 곡식을 빼앗으며, 무기를 탈취하고 남의 무덤을 억지로 파헤쳤다고 하였다. 이들 3명의 농민군 지도자는 19일 화령(化寧) 장터에서 총살되었다. 상주 소모사 정의묵이 쓴 「소모일기」에 따르면 김석중은 11월 22일에도 화령장터에서 “동괴(東魁)” 8명을 총살한 것으로 보고하였다.
고증내용
동학농민혁명 당시 상주 소모영의 유격장이었던 김석중이 쓴 「토비대략」에 기록되어 있다. 화령 버스터미널로 사용되다가 현재 공터만 남아 있다. 바로 옆에 <황소네식당>이 있다.
사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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