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상주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 역시 경상도 북부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군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1894년 5월 초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의 움직임이 어느 지역보다 직접적으로 관찰되었고, 그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은 청나라와의 일전에 대비하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전선 가설을 서둘렀고, 7월 중순에는 부산, 구포, 삼랑진, 물금포, 밀양, 청도, 대구, 다부역, 낙동, 해평, 태봉, 문경 등에 설치되었다. 각 병참부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였으며, 동학농민군은 이에 반감을 품고 이들을 물리치려 하였다. 일본군 역시 농민군의 동향을 예의 주시하며 공격에 대비하였으며, 농민군의 세력이 강성해져 경부가로(京釜街路)의 요충지가 일본군 축출을 목적으로 한 농민군 수중에 들어가게 되면 청일전쟁의 수행에 막대한 지장이 초래된다는 점을 잘 알았기 때문에 많은 농민군이 집결한 곳을 기습적으로 공격하였다.
상주에는 태봉과 낙동 두 곳에 병참부가 설치되었다. 1894년 9월 22일경 상주 농민군이 예천 함창 등지에서 퇴각해 온 농민군들과 합세하여 상주 관아를 점령하자 일본군이 오히려 이에 대해 더욱 예민하게 반응하였다. 일본군은 9월 29일 오전 10시경 사다리를 이용해서 성을 넘는 전략으로 농민군을 기습하여 상주성을 수복하였다. 이때 상주성을 공격한 일본군은 낙동수비병과 부산수비대에서 파견된 후지타(藤田)부대로 이들은 하사 4명, 병졸 60명, 통역 2명, 인부 10명의 규모로 8월 29일 낙동에 도착한 후 낙동 병참사령관으로부터 일대의 농민군을 진압하라는 지시를 받고 상주를 공격한 것이다. 농민군들은 50여 명이 전사하고 2명이 생포된 채 흩어졌으며, 농민군이 버리고 간 무기는 모두 낙동병참소로 가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