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소야리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예천지역은 물론 경상도 북부지역과 강원도, 충청도에까지 그 영향력을 떨친 대접주 최맹순이 1894년 3월 이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접조직을 설치하고 공공연하게 농민군을 규합해 나간 근거지였다. 최맹순은 본래 강원도 춘천 사람으로 1882년 무렵부터 동학에 입도하여 옹기장수를하며 포교활동을 해 왔다. 1894년 무렵에는 그는 휘하에 48개접 7만여 명의 교도들을 거느리고 있었으며, 이합집산을 하며 증대해가던 그의 세력은 6월에서 7월 사이에 가담하는 자들이 날마다 수천을 헤아렸다고 할 정도였다.
그는 검찰관을 파견하여 각 군현을 순행하며 농민군의 폐정개혁활동을 감사하거나 소송을 처결하였으나, 8월 10일 무렵까지도 양반과 관아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고 있었다. 8월 11일에는 유천 접주 조성길이 자신의 지시를 어기자 자신이 직접 그를 체포하여 예천 관아로 압송해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8월 10일 예천의 민보군이 농민군 11명을 체포하여 돌아온 후 모래밭에 생매장하여 죽인 사건이 알려지면서 그의 태도는 돌변하였다. 그는 예천 보수집강소에 통문을 연달아 보내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며 보수 집강소를 압박해 나갔으며, 8월 20일 경에는 경상도 뿐만 아니라 충청도·강원도의 각 접소에 사통을 돌려 상주의 이정(梨亭)과 예천 소야 등지에 모여 예천을 공격하자고 하였다. 이에 따라 관동대접(關東大接)과 상북(尙北)·용궁·충경(忠慶)·예천·안동·풍기(豊基)·영천(榮川)·상주·함창·문경(聞慶)·단양(丹陽)·청풍(淸風)의 13명의 접주가 상주 산양(山陽)과 예천의 금곡 및 화지(花枝)에서 대회를 열었다. 이어 이들은 예천 읍내로 통하는 길목을 사방에서 차단하고 예천 읍내 공격을 준비하였다.
예천 보수집강소에서는 21일 안동부도총소(安東府都摠所)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통을 보냈고, 23일에는 보수집강소의 민병 300여명이 화지를 공격했으나, 윤치문(尹致文)이 이끄는 예천의 농민군과 안동·의성에서 합세한 농민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소야의 관동대접주 최맹순은 8월 24일 다시 각 접에 사통을 보내 함께 예천읍을 공격하자고 하였다. 25일에는 용궁면을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갔다.
8월 28일 예천 읍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8월 29일에는 공병 소위 고토(後藤馬次郞)가 인솔하는 충주병참부의 일본군이 석문(石門)에서 농민군을 공격하여 농민군이 패퇴하자 최맹순은 강원도 평창으로 도피하였다. 여기서 100여명의 농민군을 규합하여 다시 예천을 공격하기 위해 10월 17일 예천 적성리로 들어왔다. 그러다가 다시 충청도로 이동하였으 나, 11월 21일 충주 독기(篤基) 근처에서 아들 한걸(汗杰) 및 장복극(張卜極)과 함께 예천에서 파견한 민보군에게 체포되었다. 이들은 모두 다음날이자 예천 장날이었던 11월 22일 남사장(南沙場)에서 예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당하고 모래사장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