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박학래(朴鶴來, 1864~1942)는 자는 중화(仲化), 호는 학초(鶴樵)이다. 그는 경상도 예천, 순흥, 경주, 청송, 영양 등지에서 살아왔고, 1894년 동학접주로서 무장봉기에 참여했다고 한다.
학초전(鶴樵傳)을 살펴보면, 그는 용궁관아(龍宮官衙)를 점거해서 무기를 탈취할 때 직곡접을 이끌고 참가하였다. 그 직후 최맹순의 근거지인 소야(蘇野)에서 열린 도회(都會)에도 참여하였다. 예천 집강소와 극단의 대치 상태에서 열린 화지도회에서는 모사대장(謀士大將)으로 가세하였다. 동학농민군과 예천 집강소는 8월 28일 커다란 전투를 벌이게 되는데 서정자(西亭子)전투에도 앞장서서 참여하였다.
박학래는 서정자전투 패전 후 여러 지역을 전전하며 피신을 하였다. 가족들과 헤어져서 깊은 산골 마을에 들어가 은거했으나, 아버지와 함께 충청도 접경 마을에서 관포군에게 잡혀갔다가 식채를 내고 풀려나기도 했다. 타지인 경주에 가서 약방을 경영하여 생활의 안정을 찾았으나, 동학 가담 사실을 안 사람들이 연이어 찾아와 협박하고 돈을 갈취하려고 하였다고 한다.
고증내용
이 建物은 朝鮮中期인 孝宗때에 지은 亭子와 살림집으로 亭子는 처음 三秀堂이라 하였다가 近年에 所有主가 바뀌면서 鶴樵亭으로 바꾸었다. 뒤에는 갓등산이 둘러있고 앞에는 半邊川이 흐르는 아늑한 자리에 西南向으로 자리잡은 이 建物은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亭子가 놓이고, 그 안쪽에 살림집이 있다. 亭子는 正面 3間 側面 2間의 八作지붕으로 2間의 溫突房과 4間의 대청마루로 되어있다. 세부 建築樣式은 一般的인 朝鮮中期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으며, 특히 대청의 後面과 왼쪽의 板子壁 사이에 난 두짝의 울거미 널문은 가는 중간설주가 세워져 古式의 技法을 남기고 있다. 살림집은 口字形을 基本으로 하면서 前面이 兩側으로 突出한 形態로 嶺南 內陸地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이다. 祠堂이 있었으나 撤去된 것을 除外하고는 朝鮮時代 이 地方 上流階層의 住宅 모습이 잘 남아있는 建物이다. 2021년 5월 현재 정침은 보수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