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성주(星州) 지역 역시 인근의 김산(金山)·개령(開寧)·선산(善山)·인동(仁同)·지례(知禮) 등과 마찬가지로 1894년 8월이 되면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8월 23일에는 지례 방면에서 온 농민군이 천창(泉倉)의 진사 여명구(呂命九), 장참판댁에 쳐들어가 구타하거나 돈을 빼앗아 갔으며, 20일경부터 김천 쪽에서 와서 망성(望星)·칠성(七星)의 주막과 대마(大馬)의 주막에 모여 있던 또 다른 농민군 수십여명이 도원리(桃原里)의 배덕립(裴德立)을 끌고 가 돈을 받고 풀어주었다.
8월 24일에는 김산과 지례 방면에서 온 농민군들이 성주읍내로 들어와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시장 근처의 문용원(文龍元)의 집에 도소를 차리고 30여명을 잡아다가 족치거나 송사를 처리하는 등 폐정개혁활동을 진행하였다. 다음날에는 이들 가운데 7명이 아침 일찍 관아에 들어가 수령을 깨운 뒤 곧바로 동헌으로 들어가 술잔을 주고받은 후 농민군 1명이 관아의 장교 1인, 군뢰 1명을 거느린 채 영기(令旗)를 가지고 읍내의 각 동(洞)을 순행하였다. 이 때 농민군들은 내년의 결가(結價)는 결마다 15냥, 호포(戶布)는 호마다 봄가을로 각각 6전씩 거둘 것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관아의 서리와 장교 및 사령 등이 성밖 송대(松坮) 근처에서 모여 이들에게 대항하려는 조짐을 보였다. 이 소식을 들은 농민군들은 8월 27일 관아로 난입하여 옥문을 부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군기고를 부수고로 총칼과 탄약 등을 꺼내 읍속배들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18명이 전사하고 패주하였다.
성주 관아에서는 농민군들을 쫓아낸 후 보복이 두려워 인근 동민(洞民)들을 불러 모아 밤낮으로 지키게 하였다. 성주 일대 농민군들은 일제히 일어나 대마시(代馬市)에서 유진하였는데, 그 세력이 거의 만여명에 이르렀다. 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성주목사 오석영(吳錫永)은 겁에 질려 밤중에 도망치고 아전들 역시 사방으로 흩어졌다. 농민군들은 성주부 안으로 돌격해 들어가 성주 읍내를 완전히 불태워 버렸다. 천호(千戶) 혹은 600여호에 가까운 인가(人家)에서 삼일 동안 계속 화재가 났고, 화재 연기가 백 여리에 뻗쳐 있었다. 불에 타지 않은 곳은 오직 관아 건물뿐이었고, 아전들의 재산은 모두 탈취되었다.
농민군들이 성주성을 공격한 날짜는 정확하지 않으나, 성주 지역의 향리 도한기가 쓴 「동요일기」에는 9월 3일까지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으나, 이때까지는 성주가 불타지 않았으나, 「고성부총쇄록」 9월 6일자에 “어저께 들으니 성주가 동학당에 의해 불타서 성 안팎으로 1천여호가 잿더미가 되었다”고 하는 기사가 나온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농민군의 공격으로 성주성이 불탄 날짜는 9월 4일경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