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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정보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예천 동학농민군 근거지 금당실
  • 지 역
  • 경북
  • 주 소
  •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668-1 , 665-1, 640, 622-1,620-1, 545-1.
  • 문화재
  • 분 류
  • 전투지
  • 정 의
  • 금당실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예천 동학농민군의 근거지 가운데 하나. 송림은 농민군과 관군 및 민보군 사이에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
관련 역사적 사실
예천 지역 농민군의 활동은 1894년 6, 7월에 들어 더욱 활발해졌다. 〈정감록(鄭鑑錄)〉에 나오는 이른바 ‘십승지(十勝地)’ 가운데 하나이자, 16세기 초 명당을 찾아 이주한 함양 박씨의 세거지이기도 했던 금당실에 도소가 설치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갑오척사록〉에 따르면 금당실에 도소를 설치한 것은 적성의 접주 권경함(權景咸)이었다. 그는 함양 박씨의 유계소(儒稧所) 건물을 빼앗아 〈금곡포덕소〉를 세우고, 권순문(權順文)을 접주로 삼고 무리들을 모집하였다. 8월 8일에는 예천읍내의 보수집강소 앞으로 읍내의 참봉 박기양(朴琦陽)과 전영장, 이유태, 선달 이삼문(李三文) 윤계선(尹啓善) 4인을 보내라는 요구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늦어도 7월말이나 8월초 무렵에는 조직이 완비되고 그 세력도 상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금당실의 농민군은 8월 10일 민보군이 잡아간 농민군을 석방하라는 사통을 보내는 등 지속적으로 읍내의 보수집강소를 압박해 나갔다. 8월 20일경 관동대접(關東大接)을 비롯한 상주 일대와 예천·안동·풍기(豊基)·영천(榮川)·함창·문경(聞慶)·단양(丹陽)·청풍(淸風)의 13지역의 농민군이 대회를 연 곳도 상주 산양(山陽) 및 예천 회지, 그리고 금곡으로 예천 농민군의 읍내 공격의 근거지였다. 이들은 8월 28일 밤 화지 농민군에 이어 읍내 공격에 나섰으나, 민보군에 밀려 많은 희생자를 내고 후퇴하게 된다.
패하여 흩어졌던 농민군 수천 명은 금곡에서 도회를 갖고 예천 읍내를 다시 공격하려 하였으나, 8월 29일 때마침 원병으로 온 안동 민보군 3,500여명과 예천 민보군이 공격해오자 사방으로 흩어졌다. 〈금곡포덕소〉는 이때 민보군의 공격을 받아 불태워졌다. 9월에 들어 금당실 농민군은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으나, 9월 13일에 예천 보수집강소 민보군의 공격을 받고 32명이 체포되었다. 10월에 들어서는 금곡의 사족들이 동제를 지내고 동약(洞約)을 강정하고 무기를 점고하는 등 반농민군 세력이 강화되면서 금곡의 농민군 활동도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금당실 마을은 동학농민운동 당시 이곳 송림을 사이에 두고 농민군과 일본군이 대치했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정확한 전투 일자나 상황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고증내용
「갑오척사록」, 『다시 피는 녹두꽃-동학농민군 후손 증언록』, 「대구일보」 2010년 9월 15일, 10월 11일자에 금당실과 송림에 대해 기록되어 있다. 현재 송림은 천연기념물 제469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논저
논문명(서명) 저자/필자 발행연도 쪽수
『다시 피는 녹두꽃-동학농민군 후손 증언록』 역사비평사 1994
사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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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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