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예천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1894년 3월 소야(蘇野)에서 최맹순(崔孟淳)이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관동수접주(關東首接主)가 되어 교도들을 불러 모으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세력은 6월에서 7월 사이에 가담하는 자들이 날마다 수천을 헤아렸다고 할 정도였다. 예천 읍치 외곽 다른 지역에도 농민군 도소가 설치되었고, 7월 5일 수십 명이 읍내에 들어와서 전영장 이유태(李裕泰)를 끌어내서 결박·구타하고 돈을 탈취해간 것을 시작으로 곳곳에서 기본의 신분질서를 무너뜨리거나, 악덕 지주나 토호들을 징치하였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읍정을 관장하고 폐정들을 개혁해나갔다.
이와 같이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7월 24일 예천의 이민(吏民)들은 객사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였으며, 다음 날 예천군수는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군의 창고에 있는 무기를 부민(部民)들에게 나누어주어 훈련하도록 하였다. 26일에는 집강(執綱)·총독(摠督)·도감(都監) 등 70여명의 간부를 정하고 객사에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8월 1일까지 읍내외에서 1천 5백여명의 민보군을 모집하여 관아의 무기로 무장을 시켰다.
이에 대해 농민군들은 8월 2일 읍내로 들어가는 사방 통로를 막아 예천 읍치 지역을 봉쇄하는 한편, 보수집강소 세력을 압박해 나갔다. 8월 8일 적성접주 권경함(權景咸)이 금당실에 접을 설치한 후 통문을 보내 읍내의 참봉 박기양(朴琦陽)과 전영장, 이유태, 선달 이삼문(李三文) 윤계선(尹啓善) 4인을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이들은 농민들과 동학교도에게 악행을 일삼은 대표적인 인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기양은 보수집강소에 벼 40석과 돈 1천량을 군자금으로 내고 그해의 추수도 집강소에 일임하겠다고 하며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양측이 대치하던 중 8월 10일 새벽 농민군을 분노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읍 동쪽으로 50리나 떨어진 안동 감천까지 쳐들어간 예천의 민보군이 농민군 11명을 체포하여 돌아온 후 모래밭에 생매장하여 죽인 사건이었다. 이에 분노한 농민군 측에서는 보수집강소에 통문을 보내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며 보수집강소를 압박해 나갔다. 8월 20일 경에는 경상도 뿐만 아니라 충청도·강원도의 각 접소에 사통을 돌려 상주의 이정(梨亭)과 예천 소야 등지에 모여 예천을 공격하자고 하였다. 이에 따라 관동대접(關東大接)과 상북(尙北)·용궁·충경(忠慶)·예천·안동·풍기(豊基)·영천(榮川)·상주·함창·문경(聞慶)·단양(丹陽)·청풍(淸風)의 13접주가 상주 산양(山陽)과 예천의 금곡 및 화지(花枝)에서 대회를 열었다. 이어 예천 읍내로 통하는 사방 길목을 차단하고 8월 28일 오후에는 화지의 농민군이 쳐들어와 서정자 들판에서 전투가 벌여졌으며, 그에 이어 밤중에는 금곡의 농민군이 동쪽 방면에서 공격해 왔다. 농민군들의 공격은 민보군의 반격을 받고 실패로 끝났으며, 다음날인 8월 29일에는 안동에서 구원병 3,500여명이 들어왔고, 일본군 53명과 통역·화병(火兵) 10명이 들어오면서 예천의 반농민군측은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고증내용
「갑오척사록」에 농민군을 모래밭에 생매장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으며,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는 생매장 터를 공설운동장 뒤편인 것으로 추정했지만, 정확한 장소를 확인할 수가 없어서 이곳에 비를 세웠다. 1999년에 예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동학농민군생매장터〉비를 세워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