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연락처
기념재단
TEL. 063-530-9400
박물관
TEL. 063-530-9405
기념관
TEL. 063-530-9451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로고

SITEMAP 전체메뉴

유적지 정보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예천 예천관아
  • 지 역
  • 경북
  • 주 소
  • 경상북도 예천군 예천읍 대창학교길 24-1(노상리 1-1)
  • 문화재
  • 분 류
  • 정 의
  • 동학농민혁명 당시 민보군에 의해 보수집강소로 사용되었던 곳.
관련 역사적 사실
예천 지역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1894년 3월 소야(蘇野)에서 최맹순(崔孟淳)이 접소(接所)를 설치하고 관동수접주(關東首接主)가 되어 교도들을 불러 모으면서 시작되었다. 그의 활동 범위는 경상도와 충청도, 강원도까지 걸쳤으며, 휘하에는 48개접에 7만여 명의 교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이합집산을 하며 증대해가던 그의 세력은 6월에서 7월 사이에 가담하는 자들이 날마다 수천을 헤아렸다고 할 정도였다.
한편 예천 지역 농민군들이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은 7월부터였다. 이러한 모습은 전라도 농민군이 제1차 동학농민혁명에서 전주성을 점령하였다가 5월초 물러나 각지로 귀향한 후 “집강소” 활동을 하며 상대적으로 온건한 활동을 하고 있던 것과 다르다. 이는 무엇보다 경상도 지역 농민군이 5월 초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의 움직임이 어느 지역보다 직접적으로 관찰되었고, 그에 대한 민중의 반감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은 청나라와의 일전에 대비하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까지의 전선 가설을 서둘렀다. 이를 위해 일본군은 경부 가도의 요충지에 병참부를 설치하였다. 경상도에는 동래에서 문경까지 약 40리마다 병참부를 설치하였는데, 7월 중순에는 부산·구포·삼랑진·물금포·밀양·청도·대구·다부역·낙동·해평·태봉·문경 등에 설치되었다. 각 병참부에는 일본군이 주둔하였다.
농민군은 7월 5일 수십 명이 읍내에 들어와서 전영장(前營將) 이유태(李裕泰)를 끌어내서 결박·구타하고 돈을 탈취해갔다. 7일에는 읍리(邑吏) 황준대(黃俊大)의 동생집의 무덤을 파헤쳤고, 9일에는 읍내로 들어가 읍리 김병운(金炳運)을 끌어내어 때리고, 그의 아버지의 무덤을 파헤쳤다. 15일에는 우음동(于音洞) 접주 박래헌(朴來憲)이 수십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경진가점(京津街店)에서 안동부사 일행을 공격하고 행장을 빼앗았다. 예천 읍치 외곽 지역 곳곳에 농민군 도소가 설치되었고, 곳곳에서 기본의 신분 질서를 무너뜨리거나, 악덕 지주나 토호들을 징치하였으며, 스스로의 힘으로 읍정을 관장하고 폐정들을 개혁해나갔다. 예컨대 가장 세력이 컸던 소야지역의 경우 주민들은 송사가 있어도 관아를 찾지 않고 모두 소야에 갔다고 한다. 또 농민군 자체에 검찰관(檢察官) 혹은 안렴사가 있어서 이들은 예천 풍기 등 각 지역을 순회하며 폐정개혁활동을 조정하거나 감찰하였다. 검찰관(檢察官) 장극원(張克元)은 예천 각지를 돌아다니며 포악한 자들을 징치하고 다녔는데, 그의 행장(行裝)과 수행원들이 마치 관찰사와 같았다고 한다. 그가 이르는 곳에서는 그 위세가 호랑이와 같았으며 송사를 처결해 달라고 온 사람들이 시장처럼 몰려들었다.
이와 같이 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7월 24일 예천의 이민(吏民)들은 객사에 모여 대책을 논의하였으며, 다음 날 예천군수는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군의 창고에 있는 무기를 부민(部民)들에게 나누어주어 훈련하도록 하였다. 26일에는 집강(執綱)·총독(摠督)·도감(都監) 등 70여명의 간부를 정하고 객사에서 업무를 시작하였다. 8월 1일까지 읍내외에서 1천5백여 명의 민보군을 모집하여 관아의 무기로 무장을 시켰다.
이에 대해 농민군들은 8월 2일 읍내로 들어가는 사방 통로를 막아 예천 읍치 지역을 봉쇄하는 한편, 보수집강소 세력을 압박해 나갔다. 8월 8일 적성접주 권경함(權景咸)이 금당실에 접을 설치한 후 통문을 보내 읍내의 참봉 박기양(朴琦陽)과 전영장, 이유태, 선달 이삼문(李三文) 윤계선(尹啓善) 4인을 보내라고 요구하였다. 이들은 농민들과 동학교도에게 악행을 일삼은 대표적인 인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기양은 보수집강소에 벼 40석과 돈 1천량을 군자금으로 내고 그해의 추수도 집강소에 일임하겠다고 하며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였다.
이렇게 양측이 대치하던 중 8월 10일 새벽 농민군을 분노하게 만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것은 읍 동쪽으로 50리나 떨어진 안동 감천까지 쳐들어간 예천의 민보군이 농민군 11명을 체포하여 돌아온 후 모래밭에 생매장하여 죽인 사건이었다. 이에 분노한 농민군은 예천 읍내로 들어가는 모든 길을 철저히 봉쇄하여 양곡과 땔감 등의 보급을 차단하는 한편 금곡, 상동(商東), 소야 접 등에서 통문을 보내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며 보수집강소를 압박해 나갔다. 8월 20일 경에는 경상도 뿐만 아니라 충청도·강원도의 각 접소에 사통을 돌려 상주의 이정(梨亭)과 예천 소야 등지에 모여 예천을 공격하자고 하였다. 이에 따라 관동대접(關東大接)과 상북(尙北)·용궁·충경(忠慶)·예천·안동·풍기(豊基)·영천(榮川)·상주·함창·문경(聞慶)·단양(丹陽)·청풍(淸風)의 13명의 접주가 상주 산양(山陽)과 예천의 금곡 및 화지(花枝)에서 대회를 열었다. 이어 이들은 북쪽으로는 금곡·은풍(殷豊)·송정(松亭)을 막고, 동쪽으로는 도평(島坪)·감천(甘泉)·석관(石串)을 차단하고, 남쪽으로는 직곡(稷谷, 피실)을 차지하고, 서쪽으로는 화지에 주둔하여 예천 읍내를 포위하고, 보수집강소에서 농민군을 생매장한 사건의 책임자를 압송하라는 통문을 보내는 한편 사격훈련을 하고 화약을 만들고 말타기와 창술을 훈련하였다. 25일에는 수천명의 농민군이 용궁으로 쳐들어가 무기를 탈취하였다. 예천 읍내 공격을 위한 준비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천 보수집강소에서는 21일 안동부도총소(安東府都摠所)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사통을 보냈다. 23일에는 보수집강소의 민병 300여명이 화지를 공격했으나, 윤치문(尹致文)이 이끄는 예천의 농민군과 안동·의성에서 합세한 농민군에 의해 격퇴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소야의 관동대접주 최맹순은 8월 24일 다시 각 접에 사통을 보내 함께 예천읍을 공격하자고 하였다. 25일에는 농민군 수천명이 용궁면을 공격하여 무기를 탈취하여 갔다. 다급해진 예천군수 조원하(趙爰夏)는 24일 다시 안동 도총부에 구원을 요청하고, 25일에는 경상 감영에 원병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즈음 예천 읍내는 농민군에게 사방이 포위되어 보급로가 막히면서 흰죽을 끓여 연명하는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농민군의 공격이 임박해지자 보수집강소에서는 8월 27일 총수(銃手) 100여 명을 징발하여 현산(峴山) 옆의 골짜기에 잠복시키고 밤이 새도록 지키도록 하였다. 예천읍내 공격을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예천읍 서쪽에 있던 화지 농민군이었다. 현산에 나가있던 정찰병의 보고에 따르면 28일 오후 농민군 “1만여명”이 한천 남쪽의 유정(柳汀)으로 들어가 진을 쳤다. 전투는 밤이 되어서 시작되었다. 한천제방 위에 진을 치고 있던 보수집강소의 민보군들이 서정(西亭)의 긴 제방을 에워싸고 양면에서 농민군을 협공하였다. 캄캄한 가운데 단지 유성(流星)같은 불빛만 보이고 우레 같은 소리만 들렸다. 총탄이 떨어지는 숲속에서는 나뭇가지와 나뭇잎이 어지럽게 땅으로 떨어졌으며 검은 연기가 하늘에 가득 차서 적과 아군이 구분이 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때 민보군 측과 사전에 통모한 유정 바로 남쪽의 청복동 주민들이 산 위에 횃불을 많이 설치하여 군대가 있는 것으로 위장하고 일제히 큰소리로, “안동의 구원병 3,000여 인이 올 것이다. 너희 적도들이 어디로 달아나겠는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당황한 농민군은 서정자들 쪽으로 달아났다. 많은 농민군이 오지(汚池)못에 빠져 죽었고 민보군의 공격에 전사하였다. 곧이어 금곡의 농민군이 동쪽 방면에서 공격해 왔으나, 역시 민보군의 반격을 받고 우계(愚溪)와 광천의 들판과 산골짜기로 퇴각하였다. 대규모 전투가 치러진 다음날인 8월 29일에는 안동에서 구원병 3,500여명이 들어왔고, 일본군 53명과 통역·화병(火兵) 10명이 들어오면서 예천의 반농민군측은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예천 농민군은 이후 민보군과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상주와 충청도의 단양과 제천, 상주 각지로 흩어졌으나, 10월 중순까지도 예천을 다시 공격하려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10월 18일 예천 읍내를 공격하기 위해 충청도에서 100여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적성동(赤城洞)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던 소야의 관동대접주 최맹순이 11월 21일 충주 독기(篤基)에서 체포되면서 사실상 그 활동이 약화되어 갔다.
고증내용
객사 건물(건평120평)은 원래 예천읍 서본리 현 예천초등학교 자리에 있던 것을 당시 대창학원(1922년 설립)의 원장 김석희(金碩熙)가 1927년 3월 현 위치로 이설하였다(대창고등학고 홈페이지 참조). 대창중고등학교 교장실, 행정실, 인쇄실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4)

영상
드론VR 사진에 마우스를 올려서 움직여보세요
지도
참고문헌
연관 유적지
이 페이지에 제공하는 정보에 대하여 만족도를 평가해 주세요.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는 재단이 되겠습니다.

(56149)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동학로 742

TEL. 063-530-9400   FAX. 063-538-2893   E-mail. 1894@1894.or.kr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ㅣ 사업자정보확인 404-82-08587 ㅣ 통신판매업신고 2023-전북정읍-0046호

문화체육관광부 전북특별자치도청

예약하기예약

찾아오시는길오시는길

위로

조직도 조직도

조직도 유족등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