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10월 내포지역에서 발생했던 태안관아 점령사건을 전하면서 시작된다. 태안관아 점령은 내포지역에 형성되었던 ‘관민상화(官民相和)’87) 관계가 깨지는 결정적 계기가 된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태안군수가 화친을 깨고 이 지역 동학농민군 30여명을 잡아 가두면서 비롯되었다. 더구나 이들을 곧 참수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상황은 매우 긴박하게 돌아가게 된다. 소식을 접하자마자 인근 지역의 동료들은 문장로의 집으로 삼삼오오 모여들기 시작하였으며, 징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관아를 습격하기로 계획하였다. 드디어 다음날인 10월 1일 징소리와 함께 관아를 습격하였다. 이때에는 이미 동료 30여명이 형장에 끌려나와 꿇어 앉아있고 좌우로 무사들이 나열되어 막 형이 집행되기 직전이었다.
조금이라도 늦었으면 동료들의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할 뻔한 아찔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이들은 관군을 공격하여 동료를 풀어주고, 곧바로 태안군수와 안무사(按撫使)를 붙잡아 죽인 뒤 관아를 불태웠다. 그 여세를 몰아 서산관아를 점령하고 더욱 세를 결집하여 신례원과 승전곡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기세가 등등하였다. 아곳운 원평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현재 서산시 원평 학생야영장으로 활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