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동학교단 소속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 이후 전라도로 내려갔다 무주·영동을 거쳐 보은으로 북상, 북실마을에 이르러 유숙하였다. 그러자 상주 소모영의 유격대장 김석중이 이끄는 민보군 200명, 용궁현의 포수 20명, 함창 포수 19명 등은 일본군 낙동병참소의 이세가와(伊勢川)가 이끄는 1개 분대(8명) 병력, 대구의 미다꾸(三宅) 대위가 인솔하는 1개 분대(13명), 금산지역에 군로(軍路)를 실측하고 있던 구와하라(桑原) 소위가 이끄는 병력 14명 등 모두 43명의 일본군과 합류한 뒤 보은 북실로 향하여 12월 17일 밤 야간공격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밤 10시 30분 경 귀인교를 출발한 일본군과 민보군은 종곡리 입구에서 파수를 보던 동학농민군 4명을 붙잡아 동학농민군 수뇌부의 동태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거괴 최시형은 저녁 전까지 본촌 김소촌 가에 있었으나 그 사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다. 그 집에는 차괴 임국호, 정대춘, 이국빈, 손응구(손병희), 배학수, 이원팔, 김군오, 박장준 등이 같이 있었다. 방금 밥을 지어 먹으며 술과 떡을 먹으려 한다. 나머지 무리들도 집에 가득하며 이 마을 남녀들은 모두 다른 마을로 달아나 숨었다"고 하였다.
일본군과 민보군은 누하리(樓下里)에 있는 김소촌 가를 덮쳐 농민군 지도부를 잡으려 했으나 농민군 5명만 사살하고 지도자급 인물은 모두 놓쳤다. 일본군과 민보군은 농민군 5명의 시신을 불태웠다. 이어 농민군과 일본군 및 민보군 사이에 동학농민혁명 당시 최대 규모의 전투 가운데 하나인 보은 북실전투가 시작되었다.
고증내용
1894년 12월 17일 보은 북실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동학교단 주요 지도자들이 숙박하던 집으로, 상주소모영 유격병과 일본군이 기습한 사실이 있다. 김소촌가는 보은군 보은읍 누청마을에 위치해 있다. 이 집은 김세희(金世熙, ?-1894)의 집으로, 그가 소촌찰방을 지냈기 때문에 ‘김소촌가’로 불리어졌다. 그는 통훈대부사헌부감찰을 지냈는데, 닭 같은 동물을 잘 길러 재산을 크게 늘려 만석지기로 불리어졌다. 그가 건축한 집도 고루거각(高樓巨閣)으로 불리어질 정도로 보은에서 잘 지은 집으로 알려져 있었다.
김소촌가는 일제 강점기 이후 목재가 좋아 보은읍 삼산리의 옛 보은병원 건물로 이전된 뒤 현재의 가옥이 건축되었는데, 지대가 원래 낮아졌고 대문과 창틀 등 일부만 원래의 것이다. 사실상 김소천가의 원형은 사라지고 그 터만 남아 있다. 현재 거주하던 김중구가 사망, 3년 동안 빈집으로 남아 있으며 언제 훼철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대지 소유자는 김중구의 형 김경구(58년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