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진주에서는 4월 초순 무렵부터 동학교도들이 모이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진주 병영에서는 4월 11일경 영장(營將) 박희방(朴熙房)을 보내 진주지역 동학 지도자이자 교조신원운동에도 참여한 바 있는 백낙도(白樂道=白道弘) 등 동학교도 수명을 체포하여 사형시키고 교도들을 해산시켰다. 4월 25일경 해산하였던 교도들이 다시 모여 진주 성내로 들어가 소란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이후 제1차 기포 기간에 진주 지역 농민군의 구체적인 활동상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하동부에서는 광양에서 온 농민군들이 하동의 시쾌(市儈, 장사치)들을 끌어들여 부중(府中)에 도소를 설치하고 사방을 다니며 약탈하였다. 그러나 새로 부임해온 하동부사 이채연(李采淵)이 화개의 민보군을 동원하여 농민군을 쫓아내면서 하동지역 농민군의 활동 역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진주 하동 등 오늘날 서부 경남지역 농민군은 9월에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으며, 그들의 활동은 호남의 대접주 김인배(金仁培)의 움직임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전개되었다.
전라도 금구 출신 농민군 지도자 김인배는 1894년 6월 말경 농민군을 이끌고 순천에 들어와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고 폐정개혁활동을 전개하였다. 김개남과 기맥이 통하던 금구출신의 대접주 김인배는 흥양·순천 곤양의 농민군을 이끌고 9월 1일 경상도 하동을 공격하면서 9월 10일경에 재기포하는 전봉준에 앞서 사실상 재기포를 시작하였다. 앞서 하동부사 이채연에 쫓겨 광양으로 갔던 하동지역 동학농민군은 영호대접주 김인배를 끌어들여 9월 1일 광양·순천포의 동학농민군와 함께 섬진강을 건너 하동을 공격하였다. 부사는 피신해 버린 상태에서 하동의 민보군이 주축이 되어 관아의 뒷산 안봉에서 진을 치고 대적하였으나, 2일 초저녁 하동부는 맨몸에 부적을 붙인 농민군에게 의해 점령되었다. 3일 날이 밝자 농민군은 하동부 안에 도소를 설치하였다. 농민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마을을 약탈하였다. 제일 먼저 민포군이 일어났던 화개동에서는 민가 500여 채를 불태웠다. 이들은 5-6일간 머물다가 일부는 호남(湖南)으로 되돌아가고 나머지는 김인배를 따라 진주 공격에 나섰다.
김인배의 하동 공격 소식을 접한 진주의 동학농민군들은 9월 10일 충경대도소(忠慶大都所)의 명의로 〈영우(嶺右)의 각읍 각촌에 사는 대소민에게〉라는 방문을 붙였는데, 왜적들이 침범하고 있으니 복수(復讐)로 국가에 보답하자고 하고, 진주병사가 부임한 지 1년도 못되어 왜인(倭人)과의 약조에 따라 선출된 신병사가 도임한다면서 도인과 도외인(道外人)을 가리지 않고 진주에서 대회를 갖는다며 참석할 것을 강력히 권하였다.
9월 14일 손은석이 이끄는 진주 농민군들이 폐단을 고친다는 명분으로 각 면에 통문을 돌려 무리를 모아 읍으로 들어가 장시에 장막을 크게 치고 주둔하였다. 이어 이들은 관아로 돌입하여 옥문을 부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으며, 백 명 혹은 천 명씩 무리를 지어 가서 옥천사를 공격하였다. 9월 15일에는 여장협이 이끄는 하동 농민군 수천명이 곤양 다솔사(多率寺)에서 집회를 가졌고, 고성에서는 600여명의 농민군이 관아를 공격하여 무기와 창고의 식량을 가져갔다.
이와 같이 김인배 부대의 하동 점령에 자극받아 일어난 각지의 농민군들은 하동에서 출발한 호남의 농민군과 합세하여 진주성으로 향하였다. 하동에서 출발한 김인배 휘하의 광양·순천포의 농민군은 9월 11일에는 호남의 농민군들이 남해현청에 돌입하여 수감되어있던 농민군을 석방하고 폐정개혁활동을 벌였으며, 이어 9월 13일 사천에 들어와 무기를 탈취하였으며, 15일 수천명이 곤양 읍성으로 들어왔다가 조총 20자루를 빼앗아 갔다. 이와 같이 세를 불린 영호남 연합농민군이 진주성을 점령한 것은 9월 17일이었다. 다음날 영호대접주 김인배가 천여 명을 이끌고 진주로 들어 와 질청[作廳]에 대도소를 설치하였다. 농민군들은 성 둘레에 오색깃발을 휘날렸다. 그 중 성루의 맨 앞 큰 깃대에는 붉은 바탕에 보국안민(輔國安民)이라 쓴 대형 깃발을 내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