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동학혁명 한 해 전인 1893년 12월에 노성 민란이 발생했다. 전 노성현감이 전운소(轉運所)에서 운송하다 남은 미곡 400석 중 200석을 착복하였는데, 신임 현감 황후연(黃厚淵)이 200석을 농민들에게 부담 지웠다. 이런 탐학 행위에 격분한 농민들이 봉기하여 관아를 점령하고 현감 황후연을 쫓아낸 사건이다. 당시 이 사건에서 장두는 유치복이었고, 처음 봉기를 주장한 사람은 윤상건(尹相建) 박관화(朴寬和) 이성오(李成五) 윤상집(尹相執) 윤성칠(尹成七) 윤자형(尹滋馨) 등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도망쳐서 처벌할 수 없었고, 대신 백화서(白化西)만 “주동자와 부화뇌동하여 참여한 죄”를 물어 세 차례에 걸쳐 엄하게 다스린 뒤 원악도(遠惡島)에 유배를 보내는 형벌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