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손병희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티전투 이후 11월 27일 태전전투를 끝으로 전봉준과 헤어진 이후 내장산 갈재를 넘어 순창 복흥을 거쳐 28일에 임실 갈담으로 왔다. 청운면 새목터 허선(許善)의 집에 있던 최시형과 합류한 동학농민군은 장수를 거쳐 12월 5일경 무주를 점령한 이후, 영동, 황간, 용산, 청산을 거쳐 보은 쪽으로 북상하였다. 그러자 일본군과 관군, 민보군
은 이에 대응하여 병력을 집결시키고 보은 쪽으로 향하였다. 그 핵심 병력은 일본군 낙동병참소의 이세가와(伊勢川) 군조가 이끄는 1개 분대(8명) 병력, 대구의 미다꾸(三宅) 대위가 인솔하는 1개 분대(13명), 금산지역에 군로(軍路)를 실측하고 있던 구와하라(桑原) 소위가 이끄는 일본군 14명 등 43명과 상주소모영의 유격대장 김석중이 이끄는 민보군 200명, 용궁현의 포수 20명, 함창 포수 19명 등 279명이었다.
보은으로 이동하던 중 영동 용산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청산을 거쳐 12월 16일 보은 읍내를 점령하였다. 이때 농민군 행렬은 무려 30리에 걸쳐 있었다 할 정도로 대단하였다. 보은읍을 점거한 동학농민군은 관아 건물과 관리들의 집 등을 부수거나 불태운 뒤, 다음 날 저녁 무렵 보은 북실[鍾谷] 마을로 이동하였다. 이 사실을 정탐한 일본군과 상주 유격병대는 즉 그날 12월 17일(양력 1895년 1월 12일) 밤 동학농민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기습 공격하였다. 일본군 미다꾸(三宅) 대위는 일본군 22명과 유격병 50명을 거느리고 왼쪽을 맡고, 구와하라(桑原) 소위는 일본군 16명과 유격병 50명을 지휘해서 오른쪽을 맡아 공격하였다. 그리고 유격장 김석중은 별포 40명을 인솔하여 중간을 담당해서 북실방향으로 향하기로 하였다. 남은 50명의 유격병은 소장(昭將) 박유현(朴裕顯), 김상오(金常五), 유우석(劉禹錫) 3명에게 각각 나누어 맡겨서 세 방향에서 선발로 먼저 나아가도록 한 뒤, 12월 17일 밤 10시 30분경에 일제히 귀인교를 출발해서 북실쪽으로 향하였다. 이날 저녁 무렵에는 청주병영의 병력 300여명도 북실에서 불과 20리 거리에 있는 구암점(龜巖店)에 와 있었다.
이들은 먼저 최시형 등 지도부가 모여 있던 누청리의 김소촌 집은 공격하였으나, 핵심지도부는 모두 빠져나가고 없자 곧바로 보은 북실 일대에 진을 치고 있던 농민군들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최대 규모의 전투 가운데 하나인 북실전투가 시작된 것이다. 기습 공격을 받아 혼란에 빠진 동학농민군은 반격을 가하면서 밤새도록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화력에 밀려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두 길로 나누어 동북쪽으로 피신하였다.
일본군과 상주 유격병은 동학농민군을 다음날 오전 10시까지 약 2킬로미터를 추격하여 학살하였다. 북실 골짜기 안에 남아 있던 동학농민군들도 오후 3시경까지 살육 당하였다. 청주병과 옥천 민보군은 싸움이 끝날 무렵 북실에 들어왔다.
북실전투는 동학농민혁명 전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이 가장 참혹한 희생을 당한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군은 전투 중에 총을 맞고 죽은 농민군의 수를 300여명으로 보고하고 있다. 학살한 농민군의 수는 의도적으로 보고하지 않았다. 상주 소모사 정의묵(鄭宜黙)은 전투 중에 전후 도합 395명이 총에 맞아 죽고 골짜기와 숲속에 널려있는 시체가 몇 백 명인지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영남 선무사 이중하(李重夏)는 칼에 베이거나 포살된 수가 395명이고 그밖에 계곡의 구덩이와 숲속에 죽어 넘어간 자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하였다.
이에 반해 김석중은 북실에서 피살된 북접동학농민군의 수를 총에 맞아 죽은 자가 2,200여명, 야간 전투에서 죽인 자가 393명이라고 하였다. 김석중의 보고는 과장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적어도 400여명의 농민군이 이 전투에서 희생된 것은 분명하며, 여기에는 임국호, 이원팔, 정대춘 등 동학교단 핵심간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반해 일본군이나 민보군의 피해는 미미하였다. 일본군은 부상자도 없었으며, 김석중의 유격병 가운데는 부상자 2명뿐이었다. 이러한 결과는 무엇보다 일본군이나 민보군에 비해 농민군의 무기가 지나치게 열세였기 때문이다. 보은 북실전투에서 살아남은 동학농민군은 속리산을 비롯한 여러 곳으로 뿔뿔이 흩어졌으며, 이것으로 사실상 최시형 주도의 동학농민혁명은 끝이 났다. 이를 기념해 북실전투지 근방에 ‘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고증내용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농민군부대의 마지막 전투지로서, 충북대 호서문화연구소에서 1993년에 간행한 <보은 종곡 동학유적 북실전투 및 관련 유적과 집단매장지 조사>에 상세히 파악되어 있다. 안내판이 없으며, 일부 집단매장지로 추정되는 곳을 발굴하였으나, 성과는 없었다. 북실전투지와 매장지는 성족리, 강신리, 종곡리 접경지인 가마실골 주변지역이며 가마실골 중앙에 솟대가 세워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