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예산, 덕산, 태안, 서산, 해미 지역 등 내포지역 농민군은 1894년 9월 그믐에 기포하여 10월 1일 태안·서산관아를 점령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이들은 호연초토사로 임명된 이승우가 이끄는 관군과 유회군, 또 10월 1일 도착한 일본군의 반격을 받고 목소리 대도소, 해미와 광천 등지에서 패배하여 기세가 위축되기도 했다. 그러나 10월 24일 승전곡 전투와 10월 26일의 신례원 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크게 물리친 후 농민군은 사기가 충천하여 이 지역의 웅부(雄府)였던 홍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신례원에서 홍주를 향해 전진하였다.
당시 홍주성 공략에 나선 농민군의 수는 대략 2만 5천-3만 명에 이르렀다.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을 물리친 여세를 몰아 10월 27일 예산으로 진입하여 관아를 습격한 다음 삽교 쪽으로 이동하여 역촌(현재 삽교읍 역리와 송산리) 일대에서 하루를 유숙하였다. 11월 6일 이 지역을 지나던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은 “지푸라기가 연달아 깔려 있고 빈 볏단도 널려있었다. 불을 피운 자국과 밥 지은 흔적이 수리에 걸쳐 있었다”고 하여 농민군의 수가 매우 많았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주고 있다.
당시 역리 마을 옆에서 주둔하던 농민군들은 취사에 필요한 물을 바로 이 우물에서 길어다 사용했다고 한다. 역리 일대에서 하루를 유숙한 농민군들은 1894년 10월 28일 오후 1시경 홍주성을 향해 진군하여 오후 4시경에 홍주성 외각에 당도하였다. 이때 일본군과 관군은 농민군의 홍주성 공격에 대한 정보를 미리 알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의 저항을 뚫고 홍주성을 점령하기 위해 총력전을 펼쳤다. 이것이 바로 동학농민혁명 당시 내포지역에서 일어난 가장 치열한 전투인 홍주성 공방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