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해월 최시형은 손병희・이재벽의 주선으로 상주에서 옥천 청산 문암리(현 한곡리 문바위골) 전성원(全聖元) 집으로 옮겨 거주하였는데(천도교서, 229쪽), 전성원은 당시 청산 동학접주로 활동하던 김낙현(金樂賢, 1858~1898)이었다. 김낙현은 최시형에게 39살에 “성원”이라는 호를 받았다고 한 것으로 보아, 전성원은 김성원(낙현)의 오기로 보인다.
이때 해월은 수운 최제우의 2녀인 최완(崔完, 1857-1926)의 부부도 같이 살았다. 수운의 첫째 아들 세정(1847-1872)은 양양 감옥에서 장형으로 사망하고, 둘째 아들 세정(1855-1875)은 인제에서 병사하였는데, 둘째 달은 1872년에 인제 감옥에서 출옥 뒤 허찬(?-1894)과 결혼한 뒤 해월의 보살핌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해월이 청산으로 와서 살 때 함께 거주한 것으로 보인다.
청산 문바위골에 머물던 해월은 1894년 9월 18일 황하일 등 최측근의 설득으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라는 총동원령을 전국의 동학도들에게 내렸다. 그에 따라 전국의 동학도들이 해월의 기포령을 받고 총봉기하였는데, 문바위골에 살던 수운의 둘째 사위 허찬도 부인 최완이 둘째 아들 허곤(1894-1955)을 임신 중임에도 출전하여 보은 북실전투에서 전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청산 한곡리 문바위골은 동학농민혁명사에서 중요한 장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최시형이 머물면서 대접주들을 소집해 항일전쟁을 위한 동원령을 내린 집은 당시 불탄 뒤 신축된 집에 현재 박승재가 거주하고 있으나 빈집으로 대문이 닫혀 있다. 그밖에도 이곳에는 해월의 아들 최봉주의 묘가 있었다고 하며, 동학도들의 훈련장(현재 마을 위쪽의 문암저수지 옆)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바로 위에 있는 7∼8m 가량의 문바위에는 박희근(朴晦根)·김정섭(金定燮)·박맹호(朴孟浩)·김영규(金永圭)·김재섭(金在燮)·박창근(朴昌根)·신필우(申弼雨) 등 7명의 이름이 음각되어 있는데, 일설에 의하면 동학도들이 새긴 것으로 전해지기도 한다. 또 인근 거포리 상포마을은 김연국이 살던 곳(포전리)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처럼 이곳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곳으로, 옥천군은 이곳을 향토유적(제2009-2)으로 지정하고 유적지 1986㎡에 5억5천만을 들여 동학농민혁명 역사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을 2013년에 건립하였다. 또 청산 교평리 공원에는 1997년 12월에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세운 <동학혁명군재기포기념비>가 건립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