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태인지역에서 기포한 동학농민군은 1894년 10월 1일 태안관아를 점령하고, 주변지역인 서산, 예산, 해미, 덕산 지역의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전과를 올림
1894년 10월 28일 동학농민군은 호연초토영이 있던 홍주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동학농민군은 사방으로 흩어져 후퇴함. 이후 관군과 일본군은 동학농민군 진압에 나서고 추모탑이 있는 곳에서도 이 지역의 많은 동학농민군이 희생됨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은 1977년 태안, 서산, 당진, 예산, 홍성, 아산 지역의 인사들이 주도하여 ‘갑오동학혁명군추모탑건립위원회’를 조직하면서 시작됨. 1978년 11월 현재 위치에 추모탑을 건립함
추모탑 근처의 <태인지역동학전래비>는 (사)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태안군지부 주도로 2000년 10월에 건립함
1960년대에 들어 태안지역 사람들에 의해 동학농민군을 추도하려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문원덕에 의해 1965년부터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순도자 명단(288명)이 작성되었으며, 1970년에는 태안극장에서 동학농민혁명군 위령제가 처음으로 열렸다. 이어 1977년 2월에는 갑오동학농민혁명군추모탑 건립위원회가 발기되어 1978년 11월 수많은 농민군들이 희생된 백화산 기슭의 이 자리에 추모탑 제막식이 거행되었다.
한편 내포지역에 동학이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은 1890년이었다. 서산 지곡면(地谷面)의 최형순(崔亨淳)은 1890년 3월 해월 최시형 선생을 방문하여 동학에 입도하였다. 이후 최형순은 주로 서산태안지역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하였으며, 1893년 12월부터는 상암 박희인(湘菴 朴熙寅)이 그릇장수로 변장하여 방갈리(가시내)에 들어와서 조운삼(曺雲三)과 문장준(文章峻)과 문장로(文章魯) 문구석(文龜錫) 부자를 입도시켰다. 그리고 조석헌(曺錫憲)은 그 다음 해인 1894년에 상암의 권유에 의하여 동학에 입도하고 그해 5월에 태안접주로 피임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날이 그 세력이 확대되어 태안군 전역으로 전파된 동학 교세는 불과 2-3년 동안에 큰 세력으로 뿌리를 내렸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에서 이 지역 농민군들이 어느 지역보다 활발하게 활동하게 되는 배경이 되었다. 〈태안지역동학전래비〉는 이를 기념하여 2000년 10월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