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10월 21일 광주 침산(砧山)에서 도통장 정태완(鄭台完)이 이끄는 나주 관군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후퇴하게 됨
이어 11월 11일 손화중 휘하의 동학농민군은 나주 공략을 위해 나주 북쪽의 북창(北倉) 등지에 집결하였으나, 이러한 움직임을 파악한 나주 수성군은 이를 제압하기 위해 관군을 보냄
나주 수성군에 밀린 동학농민군은 광주 용진산으로 후퇴하였고, 11월 13일 아침부터 용진산 전투가 시작됨. 동학농민군은 수적으로 우세하였지만, 관군이 가진 대완포와 천보총의 위세에 밀렸고, 추위와 보급문제로 동학농민군은 용진산 북쪽으로 후퇴함
고증내용
「금성정의록」 갑편: 다음 날 아침 정탐이 보고하기를 적은 용진산 위로 옮겨 진을 쳤다고 하였다. 드디어 중군(中軍) 김성진에게 기치(旗幟)를 크게 펼치고 적에 대응할 계책을 갖추라고 하였다.…(중략)…갑자기 수천 적도를 용진산 중봉(中峰)에서 만났는데, 적이 어지럽게 포를 쏘았다. 즉시 강춘삼에게 대완포를 시험삼아 쏘게 하고 잇달아 천보총을 연발하니 양쪽 진영의 포성이 하늘을 흔들고 땅을 요동시켰으니 수의 많고 적음이 서로 현격히 차이가 나서 상대하기가 역시 어려웠다.
「봉남일기」: 듣자니 나주의 수성군이 어제부터 북창(북창)을 진압하였는데, 근처의 접주 집에 불을 지르고, 새벽에 오중문을 용진산 아래에서 쫓아 포성이 우레처럼 크게 울려 그치질 않았고, 오중문은 목숨을 부지하고 도망하여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하였다.
「난파유고」 권3 부록: 11월 22일에 북면의 비도가 용진산의 패배에 유감을 품고 5~6개 읍의 도당(徒黨)을 불러 모았는데, 성세가 대단하여 백성을 해치고 재물을 빼앗아 인연(人煙)이 끊어지려 하였다. 급보가 왔으나 여러 차례 싸움을 한 뒤라 장졸이 모두 피로하여 휴식하고 적을 상대하려고 하였다.
「난파유고」 권3 부록: 토통장 정태완이 분통을 견디지 못하고 군장(軍將)을 인솔하여 우영(右營)과 합세해서 출군하여 신속하게 일제히 토벌을 하니 적도들이 패배하여 용진산 위로 돌아갔다. 산길이 험악하고 적들이 매우 많았기 때문에 의병을 모집하여 산허리의 4면을 포위하고 한걸음씩 전진하며 총을 난사하여 적들을 죽였다.
「난파유고」 권4 부록: 용진산의 전투에서는 수만 명의 비류가 10리에 집결하여 5~6개 마을과 면에서 인적이 모두 끊겼는데, 장군이 수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출전하여 기습적으로 베고 잡은 자는 셀 수가 없었습니다.
「나주평적비」: 무안에서 적을 만나 여춘이 죽임을 당했고, 두 번째는 서문에서 승리하여 경선이 밤에 도망을 갔으며, 세 번째는 사창에서 이겨 그 소굴을 태워 없앴고, 네 번째는 용진산에서 이겨 오권선이 겨우 죽음을 모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