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광주지역의 동학교도는 1894년 3월 말에 있었던 백산대회에 강대열, 박성동, 김우현 등이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참석하였다는 것으로 확인됨
전주화약 체결 이후 광주지역의 집강소는 손화중과 최경선이 담당함. 1894년 9월 2차 기포를 위해 전봉준은 광주에서 집강소 활동을 벌이던 손화중에게 삼례로 오라는 친필 편지를 보내기도 함
집강소 시기에 최경선은 광주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나주 공략을 위해 공격을 감행했지만 실패로 돌아감. 그리고 2차 기포 후에 1894년 10월 중순부터 손화중은 오권선이 이끄는 나주 동학농민군에 합류하여 나주성을 공격했지만 나주 수성군에게 패배하여 광주로 후퇴한 적도 있음
1894년 11월 초에는 손화중, 최경선, 오권선 등은 재차 나주성 함락을 위해 공격을 감행했지만 나주 수성군의 공격에 실패로 끝나고 맘. 공격에 실패한 손화중과 최경선은 광주로 후퇴하였고, 1894년 11월 27일 광주관아를 재점령함
1894년 12월 1일 손화중은 광주지역 동학농민군을 해산하고 떠났으며 최경선은 귀화한다는 뜻으로 방을 내걸고 감. 이후 접주 중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주윤철(朱允哲), 박윤화(朴允化), 정수해(鄭水海), 이봉조(李奉祚), 허인(許仁)과 접주인 백반석(白般石), 이여일(李汝日), 김찬숙(金贊叔), 이선규(李先圭), 심필중(沈必仲), 박윤식(朴允植), 그리고 손화중의 기포장(起包將)이었던 최서중(崔西仲) 등 20명 정도가 곧바로 체포되어 처형됨
고증내용
「남유수록」: 1894년 4월 19일. 동도(東徒)가 무장(茂長)을 함락시키고 관리와 호강족(豪强族) 1,000여 명을 죽였다. 방향을 돌려 광주(光州)를 향했는데, 행군하고 멈추는 것이 예측할 수 없고 바람과 우뢰처럼 빨랐다.
「수록」: 1894년 3월 27일 계초(甲午三月卄七日 啓草). 그날 3월 23일 도착한 부안현감 이철화(李喆和)의 보고서(牒呈) 내용에, “이달 23일 사시(巳時, 오전 9~11시) 무렵에 어느 곳의 사람인지 알 수 없는 십여 명이 머리에 황건을 쓰고 손에는 쇠로 된 창과 죽창을 잡고 본 현의 흥덕 줄포에 도착하였는데, 점심 밥 3,500상을 배정하여 마련해 달라고 알려 왔습니다. 그 뒤를 따라서 2,000~3,000명이 말을 타거나 혹은 걸어서 각각 총과 창을 가지고 와서 줄포의 사정(射亭)에 모였는데, 깃발의 구호는 인(仁), 의(義), 예(禮), 지(智), 신(信)을 쓰거나 혹은 순천(順天), 광주(光州)라고 썼습니다. 행색이 수상하여 심히 놀라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선봉진정보첩」: 광주목사가 첩보합니다. 본주(本州)에서 잡은 동도 중에 백반석(白般石), 이여일(李汝日), 김찬숙(金贊叔), 이선규(李先圭), 심필중(沈必仲), 박윤식(朴允植)은 모두 동학 접주로서 군기(軍器)를 강제로 탈취하고 백성의 재물을 억지로 빼앗았으며, 신재석(申在石), 김성춘(金成春)은 그들 도당을 모아 본읍 군기를 탈취하였고, 최서중(崔西仲)은 손화중(孫化仲)의 기포장(起包將)으로서 열읍을 따라다니면서 군기를 탈취하여 온갖 행패를 부렸으며, 최경선(崔京先)의 마부(馬夫)는 바로 무장(茂長)에 있는 김유복(金有卜)이고, 최서중의 마부는 바로 고창(高敞)에 있는 우복록(禹福彔)인데, 평민(平民)을 침학(侵虐)하되 못할 짓이 없이 하였습니다. 영남(嶺南) 김민성(金民成)은 백반석의 당질(堂姪)로서 성명을 바꾸었는데 동도 중에서 가장 행패를 부리는 놈이고, 엄소사(嚴召史)는 ‘동학통령(東學通靈)’이라 칭하는데 공정(公庭)에서 자수하였습니다.
「이규태왕복서병묘지명」: 잡록(雜錄). 각 읍을 두루 세어도 손가락으로 이루 셀 수가 없는데, 그 중에서 가장 심한 읍을 말한다면, 무장(茂長), 영광(靈光), 광주(光州), 담양(潭陽), 무안(務安), 함평(咸平), 동복(同福), 흥양(興陽), 부안(扶安), 장성(長城), 고부(古阜) 등의 읍이 큰 소굴이 될 것입니다. 통틀어 말한다면 소굴이 아닌 읍이 없습니다.
「전봉준 공초」: 1895년 2월 9일. 작년(昨年) 10월 무렵에 이 몸은 전주(全州)에서 기포(起包)하고 손화중(孫化中)은 광주(光州)에서 기포(起包)하였습니다.…(중략)… 두 사람(손화중, 최경선)은 즉시 공주(公州)로 향하다가 일본 병사(兵士)가 해로(海路)로 온다는 말을 듣고 해방(海防)하란 고로 광주(光州)만 고수하였습니다.
「순무선봉진등록」 제5: 1894년 12월 초 6일. 광주목사가 보고합니다. 광주는 지난 달 27일에 동도 수만 명이 갑자기 성 안으로 침입하여 혹은 관아에 머무르고 혹은 민가를 점거하였다가, 이달 초 1일 사시 경에 괴수 손화중이 무리를 흩뜨리고 떠났으며 최경선(崔京宣)은 귀화한다는 뜻으로 방을 내걸고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