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손병희부대와 최시형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 이후 전라도 임실과 장수를 거쳐 12월 5일 새벽 무주를 점령하였는데, 그 규모가 적어도 1만여 명에 이르렀다.
이들 동학농민군은 12월 7일(양력 1895년 1월 2일) 무주를 출발해 8일 무주 설천(지금의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과 월전(지금의 영동군 용화면 월전리) 민보군을 격파한 뒤, 황간 읍내의 남쪽에 있는 서수원에 이르렀다. 이들은 여기서 대오를 나누어 9일 황간과 영동 읍내를 점거한 뒤 10일 영동 용산장터에 주둔하였다.
이에 놀란 정부는 충청도와 경상북도에 있는 병력을 모두 영동지역 농민군을 소탕하는데 투입하도록 하였다. 영동 용산장터에 머물고 있는 북접농민군과 토벌군 사이의 첫 전투는 12월 11일 경북 상주에서 온 유격병대와 벌어졌다. 상주 유격병대 180여 명은 농민군을 계곡으로 유인해 기습하려는 작전을 폈으나, 농민군은 이를 미리 알고 후퇴하는 척 하면서 산위로 올라가 일제히 사격하였다. 양쪽의 치열한 전투는 농민군의 승리로 끝나고, 상주 유격병대는 율계령을 넘어 후퇴하였다.
동학농민군은 다음날 새벽 다시 청주 병영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 농민군은 즉시 청주 병영군을 포위하고 안개로 인해 우왕좌왕하는 청주 병영군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상주 유격병대는 급히 달려가 지원하였다. 이 틈을 타 위기에 몰린 청주 병영군은 포위망을 뚫고 후퇴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청주 영관과 병정 4명이 총에 맞아 죽었다. 그뒤 동학농민군은 여세를 몰아 청산을 거쳐 12월 16일 보은 읍내를 점령하였다.
고증내용
<<소모사실>>과 <<토비대략>>에 의하면, 최시형과 손병희 등이 이끌던 동학농민군은 공주 우금치전투 이후 전라도 임실로 후퇴, 장수와 무주를 거쳐 영동으로 북상하던 도중 설천과 월전에서 민보군을 물리친 뒤 영동 용산에 집결하였다. 12월 11-12일 경군 경리청과 충청병영 병대, 그리고 옥천 민보군과 상주소모영 유격병 등이 연합해 공격하여 격전을 벌였으나, 구체적인 전투상황과 전투지 위치 등은 알 수 없다. 인근에 동학 접주 김종무(金鍾懋) 묘소와 비석이 있으나, 구체적인 활동상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