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공주 우금티 전투에서 패배한 연합농민군은 11월 25일 원평 전투와 27일의 태인전투를 치른 뒤 흩어졌다. 손병희가 이끌던 동학교단 동학농민군은 11월 27일 태인을 떠나 임실로 향하였다. 전봉준과 헤어진 손병희는 내장산 갈재를 넘어 순창 복흥을 거쳐 28일에 임실 갈담으로 왔다. 청운면 새목터 허선(許善)의 집에 있던 최시형과 합류한 동학농민군은 장수로 가서 대부대의 위용을 갖춘 뒤 근거지인 충청도를 향해 북상하였다.
이들은 전라도 장수를 .거쳐 12월 5일 새벽 무주를 점령하였는데, 그 규모가 적어도 7천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소문에는 이들 동학농민군의 규모가 3~4만 명이나 되며 장차 청산 ․ 보은 ․ 상주 ․ 선산 등지를 함락시킨 뒤 서울로 곧바로 올라갈 것이라는 말이 무성하였다.
무주에서 다시 전열을 정비한 동학농민군은 12월 7일(양력 1895년 1월 2일) 무주를 출발하여 8일 무주 설천(지금의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과 월전(지금의 영동군 용화면 월전리)에서 무주의 민보군을 격파하였다.
월전 달밭재 전투 상황은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으나, 동학교단 동학농민군이 충청도로 북상하면서 민보군과의 첫 충돌이다. <<소모사실>> 기록에 의하면, 동학농민군 수만명이 설천과 월전 두 곳에서 민보군을 격파하고 영동으로 와서 ‘자신들의 병력이 12만명이며 청산과 상주를 함락할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동학농민군은 영동 황간 남쪽에 있는 서수원에 이르렀다. 이들은 여기서 대오를 나누어 9일 황간과 영동 읍내를 점거한 뒤 10일 영동 용산장터에 주둔하였다. 월전전투지의 정확한 장소는 확인되지 않으나, 마을 일대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것으로 보이며, 마을 입구에는 수령이 200년 된 느티나무가 서 있으며 정자와 쉼터가 마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