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방아치전투는 1894년 9월 17일 남원의 농민군과 박봉양이 이끄는 운봉 민보군과의 사이에서 방아치 일대에서 전개되었다. 박봉양의 민보군이 규모가 커지자 남원 동학농민군들은 남원성과 교룡산성의 무기들을 빼앗아 운봉에서 산동으로 넘어오는 방아치 아래의 부동(釜洞, 부절리) 지역으로 옮겨 민보군에 대비하였다.
박봉양은 100여 명의 포창군(砲鎗軍)과 이의경의 수성군 및 함양의 원병과 합세하여 농민군을 10여 리 밖으로 몰아냈는데 농민군측의 사상자는 17명, 부상자는 다수였다. 이에 반해 수성군 사망자는 1명, 부상자는 20명으로 이 전투에서 승리한 박봉양은 운성(雲城)을 방어하기 위해 순무영 참모관으로 임명되었다. 현재 학계에서는 9월 17일의 전투와 11월 14일의 전투 모두를 방아치전투, 혹은 관음재 전투로 혼재되어 기록되어 있으나 9월의 전투는 방아치, 11월의 전투는 관음치 전투가 맞는 것으로 보인다.
고증내용
「박봉양경력서」,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3, 2008, 242·255쪽.
9월 17일 밤, 군의 서쪽 10리 떨어진 남원 경계 방아치(方峨峙) 위에 수십 명의 적도(농민군)들이 경계를 침범하자 박봉양이 100여 명의 포창군(砲鎗軍)을 데리고 거괴 임창순(林昌順)을 베었고 이때 본관 이의경이 수성군과 함양의 원병을 거느리고 합세하여 적도를 10여 리 밖으로 몰아냈는데 이때 죽은 자가 17명, 부상자는 많았으며 아군은 1명, 부상자는 20명이라는 내용
「박봉양경력서」,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3, 2008, 256쪽.
“최초로 방아치에서 전투를 하여 거괴를 크게 섬멸하였는데 당시 선무사가 그 공을 아뢰어 참모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관음치에서 전투를 하였고 세 번째는 유치의 번암에서 전투를 하였는데, 매번 군졸들 보다 앞장서서 수천 명의 적을 베고 수 많은 무기들을 획득하였습니다. 승세를 타고 패배하는 적을 쫓아 남원 성 아래에 이르러 적의 예봉을 무릅쓰고 먼저 성에 올라 마침내 성을 되찾았습니다. 대개 비적을 토벌한 이래로 이처럼 여러 차례 승리한 적은 없었습니다”라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