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전주성 점령 후 김개남은 6월 25일에 남원성으로 돌아와 전라좌도 동학 대도회소(大都會所)를 설치하고 개혁 활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농민군에 대한 훈련을 지속하였다. 이때 훈련을 하였던 곳이다. 또한 7월 15일 전봉준과 함께 이곳에서 ‘남원대회’를 개최하였다.
남원대회 이후 김개남은 7월 17일경 100여 명의 정예농민군만 거느리고 임실 상이암(上耳庵)으로 들어갔으며 8월 25일 남원으로 돌아올 때 임실, 태인, 장수, 진산, 금산, 용담, 무주, 진안 등의 농민군과 함께 왔으며 이때 숫자가 무려 7만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김개남은 군제를 오영(五營)으로 편제하고 요천변에서 훈련을 하며 재기포를 준비하고 10월 14일에 5천여 명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고증내용
황현,『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2016, 333쪽.
7월 보름 무렵 전봉준과 김개남 등이 남원에서 수만 명의 동학농민군을 불러 모았다는 내용
「계초존안」,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7, 2010, 364·359쪽.
.1894년 9월 22일
“감사 김학진의 장본을 지금 보니, ‘남원부에 모여 있는 비도 5~6만 명이 각자 무기를 들고 밤낮으로 날뛰자, 전주와 금구(金溝)에 모여 있던 무리들이 이미 귀화하였다가 다시 행패를 부리고 있습니다’라는 내용
.‘비도들이 남원부에서 무리를 모아 무기를 빼앗고 부중을 검거하고 있다’는 내용
「영상일기」,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5, 2009, 32·34‧40쪽.
1894년 8월 일미상
본부(本府, 남원부) 부동(釜洞)의 동학적도 강감역(姜監役), 유학규(劉學圭)가 다른 고장의 동학도 수천 명을 거느리고 본부에 와서 병장기와 활, 총, 화약을 도둑질하여 빼앗아서 말에 싣고 부동으로 갔다. 망가진 활과 남겨진 철조각은 모두 길거리 아이들의 장난감이 되었다. 성안이 텅 비었다. 적당이 날마다 모여들어, 교룡산성(鮫龍山城, 鮫는 蛟의 오기)에 근거한 자가 수만 명이고 남원부 성안에 근거한 자 역시 수만 명이었다. 잔학한 행동이 매우 심하였다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