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전주화약 후 김개남은 남원관아를 점령하고 전라좌도 도회소라는 정청(政廳)을 설치하였다. 군제를 오영(五營)으로 편제하고 각 군·현지역의 폐정을 개혁하였다. 남원 도회소는 당시 남원부를 총괄하는 집강소로 서기와 성찰, 집사(執事), 동몽(童蒙)을 두어 업무를 분담 하는 등 관청을 방불케 하였다.
특히 전라대도소에 속한 모든 접조직은 이 오영에 편제되었으며 김개남은 군비를 확충하기 위해 인근 각 읍으로부터 무기와 군량을 거두어들였다고 하였다. 이후 10월 14일에 5천 병력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고증내용
『영상일기』, 「영상일기」,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5, 2009, 36쪽.
“적도는 본도의 대동목(大同木, 무명)과 민간으로부터 공전(公錢)과 전세미(田稅米)도 매결 10두씩을 거두었다. 앞서 적이 각방(各坊)에서 거둔 쌀은 대방(大坊)에서 백석, 소방(小坊)에서 80~90석이므로 48방에서 거둔 쌀은 몇백 석인지 알 수 없다”고 하였다.
황현,『오동나무 아래에서 역사를 기록하다』, 김종익 옮김, 역사비평사, 2016, 449쪽.
남원 산동방(山洞坊)과 구례에서 거두어들인 쌀은 300섬이나 되었다는 내용
『주한일본공사관기록』
9월 15일(양 10월 13일)자 오수 찰방 양주혁(梁柱赫)의 보고에 “관고에 쌓아 놓은 쌀과 상납할 여러 군목(軍木) 20동(同) 27필(匹)을 모두 탈취해 갔다” 하였고, 16일에는 능주목사 조존두(趙存斗)가 “남원 대도소의 지시라 하며 동전 2만 냥과 백목(白木) 30동을 탈취하여 갔다”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