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1894년 9월 18일 북접 교단에서 기포령이 내린 후 충북지역 농민군이 최초로 모인 곳은 충의대접주 손병희 예하 이용구의 근거지였던 충주 외서촌의 황산(현 음성군 삼성면 능산리)이었다. 여기에는 충청 북동부와 경기도 남동부 일대 동학농민군 뿐만 아니라 강원지역 농민군들도 합세하였다. 또한 9월 24일 경에는 허문숙과 서장옥(徐章玉) 등이 수만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충주의 용수포에 웅거하고 있었으며, 신재련도 역시 수만 명의 농민군을 거느리고 진천의 구만리에 웅거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안성과 이천 등 경기지역 농민군들도 합세해 있었다.
신재련은 충주 외서촌(外西村) 사람으로 동학농민혁명 이전부터 동학교단의 핵심 간부 가운데 하나였다. 신재련의 거주지는 충주 미산으로 알려져 있는데, 충주와 음성 일대에 걸쳐 있던 마을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신재련은 1894년 당시 청주 금암리 출신인 손병희와 진천 부창리 출신인 이종석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활동하였다. 신재련은 1894년 9월 18일 제2세 교주 최시형이 청산에 소집된 각 포 두령의 의견을 좇아 봉기할 것을 결정하고 이른바 <기포령>을 내리자, 홍재길과 함께 충주지역 접주로 기포하였다.
신재련은 자칭 ‘5읍집강(五邑執綱)’이라 하며 이미 9월 22일 죽산으로 가서 허문숙을 비방하는 방문을 붙이는 등 충주 용수포에 집결해 있던 허문속의 무리와 갈등을 일으키기도 했지만, 그 진위는 불명확하다.
신재련이 이끌던 구만리의 농민군은 9월 29일 진천 관아를 공격하였다. 당시 진천현 공형(公兄)의 보고에 따르면 “안성과 이천의 동도 수만 명이 어제 사시(巳時)에 읍저(邑底) 주위를 서너 겹 에워싸더니, 맨 먼저 동헌으로 침입하여 관사의 우두머리 및 공형과 여러 아전, 관가 하인들을 죄다 묶은 후, 군 창고를 부수어 병기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빼앗아 갔습니다”고 하였다.
10월 초까지 진천 구만리에서 기세를 올리던 농민군은 이두황이 파견한 정부군이 10월 6일 진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무극장터로 이동한 다음이었다. 10월 6일에는 다시 괴산을 공격하여 커다란 피해를 남기고 보은 쪽으로 가서 손병희 부대와 합류하였다.
고증내용
1894년 9월 18일 동학교단의 기포령에 따라 봉기한 경기도와 진천 일대의 동학농민군이 관아를 점거한 시기에 집결했던 장터였으나, 지금은 현상 변경으로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으며 안내시설이 없다.
2006년 현지 거주자 민오영(1937년생, 진천군 덕산면 용묭리 594-21)의 기 조사자료에 의하면, 구만리장터는 덕산면 진입전 한천교 부근이며, 현재 SK주유소, 21번국도 등이 지나는 곳이다. 주유소 건너편 철물점이 옛 면사무소 자리이며, 철물점 옆의 동일부동산이 옛 경찰서 자리이다. 따라서 동학농민군이 집결하였던 구만리장터는 현재 덕산 한천교를 건너서 SK주유소와 21번국도가 지나는 자리이며, 1945년 전후 장터가 현재의 위치인 덕산읍내로 이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