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박봉양은 이족(吏族) 출신으로 봉양은 자(字)이고 보명(譜名) 문달(文達)이다. 운봉 서천리에 서 있는 〈박봉양(一目) 장군비〉의 원래 이름은 〈갑오토비사적비(甲午討匪事蹟碑)〉이며, 〈박봉양 장군비〉는 최근 박씨 후손들이 기단부에 새겨놓은 것이다. 일목(一目)이라는 별칭은 그가 한쪽 눈이 없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1891년(고종 28)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에 7위로 급제하여 주서(注書, 정7품)직을 역임하기도 했다. 그는 운봉의 대표적 부자로서 권세가 막강하였다. 〈오하기문〉에 따르면 성품이 다소 거친 그는 지방 관리들을 마음대로 꾸짖고 욕보였으며, 지방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렸으며, 금을 수레로 실어 나르며 조정의 권세가를 섬겼다. 그의 뜻을 조금이라도 거슬렀다가는 바로 보복을 당하였기 때문에 지방 전체가 그의 난폭한 위세에 복종하였다고 한다. 전형적인 악질 토호였다. 1891년에는 암행어사 이면상에게 걸려 체포되어 압송되던 도중 포졸에게 뇌물을 주고 풀려난 뒤 민씨척족의 실력자 민영준에게 15만냥을 바치고 과거에 합격하였음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고 전주성에서 물러난 농민군이 각 고을로 돌아가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개혁활동을 시작하면서 세상이 바뀐 것을 목도하며 위협을 느낀 그는 가재(家財)를 약탈당할까 두려워 장수의 농민군 접주 황내문(黃乃文)에게 입도하였다. 한 달 가량 부적과 주문(呪文)을 익혔지만, 신통한 영험이 없고 입도자의 재물도 계속 약탈하여가자 동학과 단절하였으며, 오히려 재물을 풀어 민보군을 조직하여 농민군에 대적하였음
그는 1894년 7월 26일 조상의 영전에 곡하고 족친들과 뜻을 같이 하는 30여 명과 하인 10여 명을 모아 민보군을 조직하였다. 당시 김개남은 남원을 떠나 임실 상여암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운봉에 대한 농민군의 영향력이 약화되어 있었다. 또한 운봉은 고원지대로 남원에서 운봉에 가려면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야 했으므로 천혜의 요새와 같은 지형을 가졌다. 박봉양은 이런 지형을 이용하여 농민군으로부터 운봉을 지키고자 하였던 것이다. 8월 22일에 새로 부임한 현감 이의경(李義絅)이 협력하고 나서자 더욱 자신이 생겼다. 운봉의 민보군에는 함양의 포군 150명이 합세하고, 경상감사 조병호가 총통(銃筒) 300정과 화약 수천 근을 제공하는 등 경상도와 인근 지역에서 호응하는 자들이 몰려들어 그 규모가 5,000여 명을 헤아릴 정도였음
이에 따라 남원 동학농민군들은 배후를 위협하는 운봉 민보군에 대한 방비를 위해 운봉에서 산동으로 넘어오는 방아치 아래에 있는 부동(釜洞, 부절리) 농민군에게 방어하도록 하였다. 영상일기에는 8월 19일 부동의 농민군 강감역(姜監役)과 유학규(劉學圭)가 다른 읍의 농민군 수천 명을 거느리고 남원부에 있던 활과 포와 화약을 부동으로 실어갔다고 하였다. 이 무렵 남원에 들른 전봉준이 직접 박봉양을 찾아가 농민군과 대적하지 말 것을 요청하기도 했으나, 그는 거절하였음
9월 중순경 부동(釜洞, 부절리)의 접주 유학규(劉學圭)가 백여 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운봉을 야간 기습하였다. 〈박봉양경력서〉에는 “9월 17일 야반에 백여 포군을 거느리고 달려가 돌격하여 거괴 임창순(林昌順)을 참하고 싸웠다. 현감 이의경(李義絅)이 끌고 온 수성군과 함양군에서 온 원병이 당도하여 힘을 합쳐 기세가 올라 적도들을 10여 리 밖으로 몰아냈다. 이때 … 살해한 자는 17명이요 부상을 입고 달아난 자는 부지기수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때 타격을 입은 운봉의 민보군은 한동안 잠잠했으며, 남원 농민군은 인근 고을로부터 북상을 위한 군수물자를 예정대로 거두어들였음
박봉양은 김개남이 이끄는 남원 농민군의 주력이 북상한 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김개남은 10월 14일에 5천 병력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전주로 향하였다. 김개남은 남원의 화산당(花山堂) 접주인 이문경(李文卿)과 남원 오수 접주 김홍기, 임실 접주 최승우, 흥양 접주인 유복만, 담양 접주 남응삼, 장수 접주 황내문에게 남원성을 지키도록 맡겼다. 이들이 거느린 병력은 약 3천명 정도였음
대군이 북상하자 예상대로 운봉의 민보군은 반격을 시도하였다. 남원에 살던 운봉의 전 현감 양한규(梁漢奎)는 10월 20일에 사인(士人) 장안택(張安澤)과 정태주(鄭泰柱)와 공모하여 운봉 박봉양을 부추겨 남원을 공격하자고 하였다. 이들은 10월 24일에 민보군 2천명을 동원하여 남원성을 공격하였다. 남원성은 거의 비어 있어 싸우지 않고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남원성을 점령하였던 박봉양은 10월 27일에 스스로 물러갔다. 유복만과 남응삼 등이 이끄는 대규모의 농민군이 남원성으로 온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담양의 남응삼은 전량관(典糧官)의 소임을 위해 9월 30일에 병력을 이끌고 남원을 떠나 10월 1일에 담양에 이르러 식량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조달하였으며, 10월 14일에 김개남 대군이 남원을 떠나자 담양에 있던 남응삼은 10월 24일에 남원으로 향하였다. 이들은 남원으로 직행하지 않고 병력을 증강하기 위해 태인 오공리(五公里) 김삼묵(金三默)에게 들려 수천 명의 병력을 합류시켰으며, 25일에는 임실로 내려와 다시 증원한 다음 남원 동학농민군과 합세하여 27일에 남원성에 들어 왔음
11월 14일에는 남원 지방에서 가장 큰 전투인 방아치 전투가 벌어졌다. 운봉 수성군은 14일 새벽 2시에 2천명의 병력을 관음치 일대에 배치하였다. 새벽 4시경 이들은 담양의 남응삼, 남원 관노 김원석과 오수 접주 김홍기, 임실 접주 최승우 등을 중심으로 남원 부동촌(釜洞, 부절리)에 둔취하고 있던 농민군을 공격하였다. 이 때 운봉 수성군은 경상도로부터 300정의 무기를 지원 받아 전투력을 강화시킨 후였다. 부절리에 주둔하고 있던 농민군은 군악을 울리며 수천 명의 병력을 산상으로 진격시켰다. 〈박봉양경력서〉에 따르면 이 때 박봉양은 민보군의 절반을 이끌고 산 밑으로 내려가 선제공격하여 접전할 기세를 보이다가 후퇴하여 산상, 곧 방아치 쪽으로 적을 유인하여 진을 치고 있던 민보군과 합세하여 농민군을 역공하였다고 한다. 14일 새벽 4시경부터 15일 아침 8시까지 약 28시간에 걸쳐 농민군과 민보군은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전투지역은 방아치를 중심으로 여원치, 관음치 등 운봉과 산동 및 남원의 경계 일대였다. 이 전투의 결과 관군 30여 명이 전사하였지만, 소떼를 앞세우고 공격한 농민군들도 크게 타격을 입었다. 이용석(李用石), 박중래(朴仲來), 고한상(高漢相), 조한승(趙漢承), 황경문(黃京文) 접주급 인물 5명도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농민군이 일방적으로 당하지는 않았으나 패배한 것은 사실이다. 이 방아치 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농민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음
운봉에서 병력을 재정비한 박봉양은 11월 28일에 재차 남원으로 출동하였다. 당시 남원성에는 화산당(花山堂) 접주 이문경(李文卿)과 오수 접주 김홍기, 임실 접주 최승우가 지키고 있었다. 성 위에서 완강하게 방어하자 운봉 수성군들은 접근하기가 어려웠다. 〈오하기문〉에는 민보군의 병력은 4천여 명, 농민군은 8백여 명이라 하였다. 운봉 수성군은 오후 4시경에 성문 아래 민가에 불을 지르고 남문과 서문에 나무 단을 쌓고 기름을 부어 불을 질렀다. 농민군은 서문과 남문이 불 타 버리자 밀려드는 민보군을 막을 길이 없어 중과부적으로 북문으로 빠져나갔다. 〈박봉양경력서〉에는 농민군 30여 명을 사살하고 백여 명을 생포했으며, 민보군도 5명이 전사하고 부상자가 84명이라 하였음
성안으로 들어간 박봉양군은 닥치는 대로 약탈하였다. 된장, 냄비, 솥, 기타 일체의 주민 재산을 빼앗아 갔다. 남원성에는 관미(官米)와 동학농민군의 군량미가 많았는데 박봉양이 민병을 시켜 모두 빼앗아 갔다고 하였다. 박봉양은 12월 3일에 일본군과 경병이 전주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남쪽 산동방(山洞坊) 상동원으로 갔다. 〈박봉양경력서〉에는 “일병이 전주에 도착하자 소인배들의 헐뜯는 말을 들고 자신을 용납하지 않으리라”는 기미를 알아차리고 피했다고 하였으나, 남원성을 비롯하여 곳곳에서 자신이 저지른 죄상에 대한 처벌이 두려워 미리 겁을 먹고 도망간 것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