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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지 정보

사람이 하늘이 되고 하늘이 사람이 되는 살맛나는 세상
남원 여원치 운봉민보군 주둔지
  • 지 역
  • 전북
  • 주 소
  •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 준향리 산 76
  • 문화재
  • 분 류
  • 주둔지
  • 정 의
  • 남원 농민군과의 전투에 앞서 운봉 민보군이 주둔하였던 곳
관련 역사적 사실
남원시 운봉읍에 있는 운봉 민보군의 주둔지이다. 농민군은 11월 13일 방아치와 여원치의 갈림 길목인 쪽뚤에 진을 치고, 운봉으로 진격하고자 하였으나 운봉 수성군은 정보를 입수하고 14일 새벽 2시에 2천 명의 병력을 관음치 일대에 병력을 배치하고 방아치 쪽으로 농민군을 유인하여 역공하였다고 한다.
전투결과 관군 30여 명이 전사하고 농민군은 이용석(李用石), 박중래(朴仲來), 고한상(高漢相), 조한승(趙漢承), 황경문(黃京文) 등 접주 급 인물 5명을 비롯하여 2천여 명이 전사하였다.이후 박봉양은 11월 28일에 남원성을 탈취하였다.
백두대간의 능선인 여원치는 남원시 이백면과 고남산과 입망치 사이에 있으며 현재 2차선 도로가 개설되어 있다.
고증내용
「운봉군전주서 박봉양경력서」,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3, 2008, 242쪽
박봉양은 7월 26일 족당(族黨) 30여 명과 가동(家憧) 수십 명을 불러 모았고 이어 사민(士民)들도 합세하여 1,200명이 되자 남원 경계의 요충인 여원치(女院峙)·입망치(笠望峙)·유치(柳峙)의 세 길목을 굳게 지켰으며 뒤이어 인원이 5,011명이 되자 방비해야 할 주요 37군데 중 지형의 중요도를 헤아려서 민정(民丁)을 뽑아 보내고 방어 장비를 고루 배치하였다는 내용
「박봉양경력서」,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3, 2008, 256쪽.
“최초로 방아치에서 전투를 하여 거괴를 크게 섬멸하였는데 당시 선무사가 그 공을 아뢰어 참모관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두 번째는 관음치에서 전투를 하였고 세 번째는 유치의 번암에서 전투를 하였는데, 매번 군졸들보다 앞장서서 수천 명의 적을 베고 수많은 무기들을 획득하였습니다. 승세를 타고 패배하는 적을 쫓아 남원 성 아래에 이르러 적의 예봉을 무릅쓰고 먼저 성에 올라 마침내 성을 되찾았습니다. 대개 비적을 토벌한 이래로 이처럼 여러 차례 승리한 적은 없었습니다”라는 내용
「장계」, 『동학농민국역총서』7, 2010
갑오년 12월 초9일 봉계
방금 도착한 함양 군수 김영순(金永順)의 첩정에 의하면 “본군의 포군(砲軍)과 민정(民丁) 가운데 정예하고 건장한 자들로 우선 100명을 조발(調發)하여 전라도 운봉현을 구원하게 하고 추후에 도착한 운봉현 여원치(女院峙) 방수장(防守將)이 보낸 사통(私通)에 ‘11월 25일에 남원(南原) 노담촌(魯坍村)을 방수(防守)하는 백성이 동학의 무리 6명을 붙잡아 왔다”는 내용
논저
논문명(서명) 저자/필자 발행연도 쪽수
남원의 동학혁명운동 연구 표영삼
『동학연구』 5집 한국동학학회 1999
『南原圈東學農民戰爭의 展開』, 韓國敎員大學校碩士學位論文 姜松鉉 1999
사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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