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내용
『일성록』, 고종 30년 3월 27일조
고종이 호남에서도 금구에 동학도가 많다 하니 전주 감영에서의 거리는 얼마이며 이들의 소굴을 격파하고 일소하는 방도를 묻자 김문현은 거리는 30리며 금구 원평에 과연 취당하고 있다고 답변하는 내용
「토비대략」,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3,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8, 373쪽. 동적의 40,000~50,000명이 한 무리는 보은 장내에 모이고 한 무리는 호남 금구 원평에 모여 척왜척양을 내새웠다는 내용
「수록」,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3, 2008, 15·17쪽
3월 25일 낸 금구현의 보고에서, “저들 무리들이 태인에서 점심을 먹고 원평에서 머물러 잤으며, 전주로 향할 것이라는 내용이 있었는데 원평의 마을 두민의 문장에 의거하여 이에 첩보합니다”라는 내용
一. 4월 초 1일 묘시(卯時, 오전 5~7시)에 낸 금구의 문장에는, “동학도 6,000~7,000명이 3월 29일 술시(戌時)에 태인현에 도착하여 곧바로 머물러 잤고, 4월 초 1일 오시(午時)에 금구현 원평점에 도착하여, 그 마을 앞 냇가에 진을 치고 곧바로 머물러 잤다고 하며, 다시 향한 곳은 없다”는 보고 내용
「양호초토등록」,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1, 2007, 119쪽.
원평점(院坪店)에 도착하여 그곳에 사는 주민들이 고(告)하는 내용을 들으니, “윤음을 가지고 온 2인이 저들에게 잡혀 이곳에서 살해를 당하고, 또 서울로부터 내려온 관원 1인과 하인 2인도 마침 여기를 지나다가 함께 살해를 당하여 5구의 시신을 함께 마을 뒤편에 버려 두었다”는 내용
「兩湖電記」,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 1, 2007, 212쪽.
4월 29일 을해
금영에서 전주로 가기 위해 장성의 갈재를 넘어 완영으로 가기 전 금구의 원평에 이르렀을 때 농민군이 노문선전관과 하인 두 사람, 윤유선유종사 이효응, 배은환을 모두 살해했다는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