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하여 원평은 대단히 뜻 깊은 곳으로 전주로부터 서남쪽으로 15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은 1893년 금구취회의 현장이었으며 금구대접주 김덕명포의 근거지였다. 1893년 3월 동학지도부가 주도한 취회가 충청도 보은에서 열리고 있을 때 일군의 호남지방 동학지도부에 의한 취회가 이곳 원평에서 열렸다. 이를 금구취회 또는 호남취당이라고 부른다. 대체로 전봉준이 중심이 되었고 손화중도 참여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전 시기에 전개된 동학교도들의 집회가 주로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 등 종교적 목적에 치중하였던 것과 달리 1893년 3월의 금구집회와 보은취회에서는 ‘척왜양’의 기치가 중심을 이루어짐
한편 이곳 원평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4월 23일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경군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둔 다음 전주로 북상하던 농민군이 하루 머물렀던 곳이다. 처음으로 경군과 접전하여 승리한 후 여세를 몰아 정읍을 거쳐 전주를 향하였다. 4월 25일 원평에 도착한 농민군은 이곳에서 국왕의 효유문을 가지고 온 이효응(李斅應)과 배은환(裵垠煥)을 살해하였다. 국왕이 보낸 군대와 맞서 싸운데 이어 국왕이 보낸 사자를 죽인 것이다. 원평에서 하루를 숙영한 농민군은 다음날 팥정(두정)으로 이동하여 하루를 더 보낸 후 삼천을 건너 4월 27일 전주성을 점령함
또한 원평은 그로부터 7개월 후인 11월 25일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패퇴한 농민군이 이곳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맞아 전투를 벌여 패전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도 구미란에는 당시 무명농민군의 무덤으로 보이는 봉분이 발견되어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에서 관리·보존하고 있다. 현재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에서 김제시와 함께 원평 구미란 전투에서 희생된 농민군의 뜻을 기리기 위해 무명농민군의 묘지조성사업을 추진하고 있으며 이곳을 사적지로 신청해 놓은 상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