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농민군이 집강소를 설치했던 곳이다. 집강소 시기 금구 원평지역에서는 이 지역의 대접주 김덕명이 중심이 되어 폐정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때 원평 학원마을에 살던 백정출신의 신분인 부자 동록개가 김덕명을 찾아와 ‘신분차별이 없는 평등세상을 만들어 달라’며 이 집을 농민군에게 헌납하였다. 농민군은 이 집을 농민군 집강소로 활용하여 백정출신인 동록개가 원하던 폐정개혁활동을 전개하였다. 동록개의 집은 1882년 4칸의 초가로 지어졌으며 집강소로 활용된 이후에는 금산면사무소, 원불교 교당, 개인 주택 등으로 사용되었다. 2015년 12월에 원형으로 복원하였다.
고증내용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2,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7, 402쪽. 김덕명은 원평점에 도소를 크게 설치하고 사사로이 공전·공곡을 받아들이고 평민을 침탈한 자라는 내용
「봉남일기」, 『동학농민혁명국역총서』5, 동학농민혁명참여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 2009, 514쪽.
27일 새벽에 경군과 왜군이 원평 도인들의 진을 덮쳐 도륙을 내고, 전주성 밖 주접주(朱接主)의 집을 태우고 원평 도소를 태웠다는 내용
이이화, 「동학당시찰일기 해제」, 『김제땅 동학농민혁명』, 김제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2010, 42~43쪽. 1894년 7월 17일(양) 우미이라 일행이 원평 도소에 도착하여 도소의 통령인 조원집, 김윤호와 이야기를 나누는 기록으로 도소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등 도소(집강소)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주변 경관, 직책 등)이 실려있음.
『김제동학농민유적지 현황와 활용방안』,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1, 18쪽. 구술자들의 증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