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증내용
「栢谷誌」, 『동학농민국역총서』 6, 2007, 561쪽.
“1894년 7월에 호남의 동학인 김인배(金仁培)와 옹방규(邕方奎) 등이 하동(河東)을 함락하니, 진주병사 민준호(閔駿鎬)가 매우 겁이 나서 소와 술로 경계에서 영접하고 문을 열어 그들을 맞아들었다. 그들이 진주에 들어오는 것이 마치 사람이 없는 곳에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이에 전에 귀화하였던 자가 모두 기뻐 뛰며 다시 일어나서 손웅구를 추대하여 와주(窩主, 도적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곳곳에서 모여 위험스런 말로 선동하여 말하기를 “백낙도(白樂道)를 위해 원수를 갚으려고 한다.”고 하니, 영장 박희방이 도망하였다. 이때에 조정에서 어쩔 수 없이 왜로 하여금 동학을 잡게 하니 김인배 등이 그 소식을 듣고 두려워서 호남으로 도망하였다. 그래서 웅구(雄狗, 손웅구) 등도 크게 두려워서 군대를 내어 난리를 일으키려 하였다“는 내용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농민국역총서』2, 2007, 366·367쪽, 1894년 12월 29일
군의 동면(東面)에 사는 이수희(李守喜)도 역시 거괴로 김인배(金仁培)에게 붙좇은 자로 순천(順天)에 주둔하였고 다시 좌수영(左水營)을 침범하였으니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는 자로이달 25일에 본 군으로부터 경내로 잡아들여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시킨 사정을 연달아 급히 보고한다는 내용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농민국역총서』2, 2007, 383쪽. 1895년 1월 초 3일
각처의 동도 천여 명이 본 읍의 성안에 진을 치고 그 소요를 일으키는 것이 일정하지 않던 터에 이달 초 7일 향리(鄕吏)와 백성들이 일시에 힘을 합쳐 이른바 영호(嶺湖) 대접주 금구의 김인배와 영호 수접주 순천의 유하덕(劉夏德) 두 놈을 모두 붙잡아서 효수하여 사람들을 경계하였다는 내용
「순무선봉진등록」, 『동학농민국역총서』2, 2007, 415쪽.
1895년 1월 13일
”순천부는 호남 좌도 바닷가의 큰 고을로서, 작년 6월 이후로 금구의 적괴 김인배 무리가 각처의 비도를 이끌고 10만의 무리를 지어 성안에 들어앉아 영호도회소(嶺湖都會所)를 설치하고, 무기를 약탈하고 사람들의 돈과 재물을 빼앗고 감히 군수품이라 일컬으며 돈을 배정하고 곡식을 걷는 일을 제멋대로 하였습니다. 아전은 숨고 백성들은 흩어져 읍 전체가 지탱하기 어려웠는데 얼마나 다행인지 지난 12월 초 6일 아전과 백성들이 의기를 떨치고 일어나 출격하여 도집강·접주·접사·성찰(省察)·괴수 등과 나머지 추악한 무리 몇백 명을 일망타진하여 지금 보는 대로 온 경내가 편안해졌다”는 내용
양호우선봉일기, 『동학농민국역총서』7, 2010, 155쪽.
1894년 12월 10일
영호대접주(嶺湖大接主)라고 불리는 금구(金溝)의 김인배(金仁培)가 순천부에서 도망하여 광양현에 숨었는데, 해당 현에서 김인배와 그를 따르던 2놈을 잡아서 베어 죽였다는 공형(公兄)의 문장(文狀)이 와서 그들의 수급(首級, 머리)을 바치고 나머지 무리를 더욱 기찰(譏察)하여 잡도록 해당 현의 공형에게 특별히 지시하였다는 내용
「선봉진정보첩」, 『동학농민국역총서』 8, 2010, 150쪽.
음력 1894년 12월 26일
낙안군수가 첩보합니다.
본읍 동면(東面)에 사는 동학하는 놈 이수희(李守喜)는 애초에 유봉만(劉奉萬)의 협종(脅從)으로 이달 몇 일에 순천(順天)에서 넘어와 불법을 자행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본읍의 백성들을 시켜서 잡아 죽일 계획이었는데, 이수희 놈이 먼저 기미를 알아차리고 순천으로 도망가서 다시 김인배(金仁培)의 협종이 되었습니다. 동적(東賊)이 두 번째 좌수영(左水營)을 범할 때 중군(中軍)으로 따라갔는데, 이 달 25일 술시(戌時, 오후 7~9시) 쯤 남상(南上) 쌍전(雙田) 앞길에서 잡아서 당일 진시(辰時, 오전 7~9시)에 군민(軍民)을 크게 모아놓고 효수하여 민중을 경각시킨 뒤에 수급(首級)을 싸서 좌수영(左水營)에 보냈으므로 그에 대한 연유를 첩보합니다
「장계」, 『동학농민국역총서』7, 2010, 314쪽.
경상도관찰사가 올린 장계 [1894년 9월 30일]
18일에 영호대접주 김인배(金仁培)가 1,000여명을 이끌고 성안의 이청(吏廳)에 들어왔는데, 동라(銅鑼)와 북을 두드리고 포소리가 우레와 같았으며 총·창·칼이 매우 예리하였습니다. 대열 전면에 붉은 깃발을 세웠는데, 보국안민(輔國安民)4자를 크게 썼습니다. 술과 밥을 토색질 하는 것을 감당할 수가 없어 관속(官屬)과 읍민(邑民)이 대부분 도망을 가서 숨었기 때문에 여러번 타일렀더니 읍내의 무리들이 19일에 비로소 물러갔습니다
日本外務省外交史料館所藏文書(1) 日本外務省外交史料館所藏文書(1) 明治27年 12月 25日 東學黨討伐公報(承前)
順天に在る首領は金仁培、鄭禹洪の二名にて
全羅道は目下到る處東徒の暴行甚しと
「大阪朝日新聞」 明治28年 1月 8日
本月初順天府光陽縣二村の役人及び人民より東
學黨の巨魁金仁倍、リウカトク、鄭虞炯以下を
殺して左水營に降伏し赦罪を請ふ筑波の分遣隊
は五日光陽に上陸して金仁倍、リウカトクの首
級を實見せり左水營の韓兵五百名順天府に赴け
り目下東學黨は首領を失
ひ四方に散亂せり
「천도교서」, 『동학농민국역총서』13, 2015, 123쪽. 제2편 해월신사(第二編 海月神師)
금구 김덕명(金德明), 송태섭(宋泰燮), 김응화(金應化), 조원집(趙元集), 이동근(李東根), 김방서, 김사엽(金士曄), 김봉득(金鳳得), 유한필(劉漢弼), 김윤오(金允五), 최광찬(崔光燦), 김인배(金仁培), 김가경(金可敬),
별계 갑오년 12월 28일 별보
광양현에서도 또한 민포(民砲)를 설치하여 거괴(巨魁)들인 김인배(金仁培)와 유하덕(劉夏德) 두 놈과 패거리 80여 명을 붙잡아 죽였으며 또 양호 도순무영(都巡撫營)의 선봉(先鋒)이 경군(京軍)을 거느리고 와서 해당 현에 머무른 까닭에 월경(越境)하지 못하게 하라는 뜻으로 각 진에 알려 왔으므로 즉시 회군(回軍)하였습니다
갑오동학란, 『동학농민국역총서』13, 2015, 123쪽.
하동군(河東郡)에서 김인배(金仁培)가 동학군을 이끌고 관군과 교전하여 관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이화 외, 『대접주 김인배, 동학농 민혁명의 선두에 서다』(2004)
1894년 12월 일 광양현에서 잡은 동도 성명성책 [甲午 十二月 日 光陽縣捕捉東徒姓名成冊]
영호남대접주 금구 김인배 효수
이이화, 『파랑새는 산을 넘고 : 나라여, 백성의 소리를 들으라-김인배:영호남을 두루 누빈 청년 장군』, 김영사, 2008, 113쪽.
김인배는 김제군 봉남면 화봉리 출생
『동학농민군 후손 증언록 다시피는 녹두꽃』, 역사비평사, 1994, 181쪽.-김인배 증손자 김영중 구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