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역사적 사실
동학교도들은 1893년 2월 교조 최제우의 신원 상소를 올리고 10월 17일경 서인주와 서병학이 주도하여 공주에서 신원을 위한 집회를 개최하였다. 이어 11월 3일 동학교도들을 삼례역에 집결하여 교조의 신원과 포교의 자유를 허용해달라는 집회를 이어나갔다.
또한 이곳은 삼례 대도소가 있었던 곳이다. 전봉준은 1894년 9월 10일경 대도소를 설치하고 각 관아에 통문을 발송하며 기병을 호소하였다. 삼례는 도로가 사방으로 통하는 지리적 요충지이며 역참이 있어 임시거처로 사용할 수 있는 저막(邸幕)이 많아 농민군들의 집회 장소로 용이하다는 이점이 있다.
고증내용
해월 등 동학교단 지도세력은 교통이 좋은 전라도 삼례역을 집결장소로 택해 대규모 평화적 집회를 갖기로 결의하였다. 『天道敎會史草稿』 15장.
1892년 10월 27일 밤 전라도 삼례도회소 명의로 삼례에 집결하라는 동학 교단의 동원령이 담긴 경통이 각 포에 발송되었다. 『한국민중운동사자료대계:동학서』 70쪽.
10월 29일 이후 전라도 각지에서 삼례로 몰려들기 시작한 동학교도들의 수는 11월 1일에 이르러서는 수천 명을 헤아렸다. 『천도교회사초고』, 15~16장.
1892년 11월 3일(양력 12월 21일), 동학교도 수천 명이 삼례로 모여들어 전라감사 이경직에게 건의사항을 전달했다. 이때 이경직으로부터 동학교도의 피해를 막고 교조신원의 뜻을 조정에 전달하겠다는 약속을 받고 물러났다. 「전봉준과 동학농민전쟁 ➀ 봉기 – 전주성 점령」, 『역사비평』, 206쪽.
“이달(9월) 14일 전봉준은 삼례역에서 비도(匪徒) 800여 명을 인솔, 포를 쏘고 북을 울리면서 전주성내로 들어왔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